
[일요서울ㅣ정찬대 기자] 지난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후보의 대선캠프에서 노무현 정권에 의한 ‘김경준 기획입국설’이 제기됐다.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이었던 홍준표 전 대표는 김경준씨와 청와대가 이 후보의 낙선을 위해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담긴 편지 한 통을 소개한다.
김씨와 미국에서 함께 수감 생활한 신경화씨의 편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이명박 후보는 BBK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모든 초점이 노무현 정권의 ‘김경준 기획입국’으로 맞춰졌다.
그러나 최근 검찰조사에서 이 모든 것이 정치공작임이 드러났다. 편지는 신경화씨가 작성한 것이 아닌 동생 신명씨가 양승덕 경희대 관광대학원 행정실장의 지시를 받고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배후에는 이명박 정권 최고 실세였던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이 지목되고 있다.
‘BBK 가짜편지’, 그것은 ‘정치공작’이었다
‘BBK 편지사건’의 발단은 BBK 사건 당사자인 김경준씨(현재 수감 중)가 ‘BBK 가짜편지’의 작성자인 신명씨와 형 신경화씨를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200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의 BBK 검증공세에 맞불을 놓으며 ‘김경준 기획입국설’을 제기한 한나라당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BBK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한나라당은 신경화씨가 김경준씨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자네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선캠프는 ‘큰집’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라 지목하며 이명박 후보의 낙선을 위해 노무현 정권과 김씨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이른바 ‘김경준 기획입국설’을 제기한다.
검찰은 대선이 끝난 후 2008년 이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김경준 전 BBK대표의 자작극으로 결론 내렸다. 그런데 김경준씨가 최근 신씨 형제와 홍준표 전 대표를 고소하면서 다시금 이 사건이 불거졌고, 결국 이명박 대선캠프에서 기획된 사건임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이중희)는 ‘BBK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된 가짜편지가 신경화의 동생 신명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했다. 특히 17대 대선 당시 가짜편지를 공개한 홍준표 전 대표는 지난 2일 검찰에 출석해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으로부터 문제의 가짜 편지를 받았다”고 진술,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신명→양승덕→김병진→은진수→홍준표 전달
현재 부산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돼 수감 중인 은진수 전 감사위원은 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법률지원단장과 함께 ‘클린정치위원회’ BBK사건 대책팀장을 맡았다. 검찰은 은씨를 상대로 가짜편지가 허위 내용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한 채 이를 홍 전 대표에게 전달했는지 여부와 가짜편지를 작성, 공개토록 지시한 배후인물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지난 5일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은씨는 BBK 편지를 김병진(현 두원공대 총장) 당시 이명박 대선후보 상임특보에게 받아 홍준표 전 대표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짜 편지인지는 몰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앞서 신명씨가 양승덕 경희대 관광대학원 행정실장의 지시로 BBK 편지를 작성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그리고 양씨는 검찰조사에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김병진 특보의 요청을 받고 가짜 편지를 김 특보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BBK 가짜편지의 경로를 살펴보면 신명(신경화의 동생)→양승덕 경희대 실장→김병진 상임특보→은진수 전 감사위원→홍준표 전 새누리당 대표의 순으로 전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편지를 작성한 신명씨와 이를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진 양승덕씨 사이의 연결고리가 모호해 이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신명씨는 양씨가 가짜편지를 쓰게 했으며, 양씨로부터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위원장, 이 대통령의 손윗동서 신기옥씨 등이 이번 일을 조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검찰은 이른바 ‘윗선’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면죄부 주는 검찰조사
2007년 대선 당시 ‘김경준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된 ‘BBK 가짜편지’ 의혹 수사를 총괄·지휘하고 있는 윤갑근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지난 14일 “실체와 윤곽은 분명히 있고, 사건 관련자들의 처리 방향도 다 결정됐다”며 BBK 실체규명을 장담해 왔다.
그러나 관련자 모두가 입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은 김경준씨가 신씨 형제와 홍 전 대표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으로 한정해 ‘배후’ 수사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스스로 ‘몸통’이라 밝힌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만을 구속하고 윗선개입은 풀지 못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관련자 모두를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한 내곡동 사저 사건 등과 마찬가지로 ‘가짜편지인지 몰랐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인정해 ‘BBK 편지 사건’ 역시 부실수사로 끝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은 사안의 중대성과 국민적 의혹이 크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된 사건에 대해 국정조사나 특검도입 등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특히 야권은 검찰이 정권 말 권력형 비리에 대한 ‘면죄부’를 씌워주고 있다며 청문회까지 요구하고 있다.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는 최근 진행된 검찰수사 결과와 관련, “검찰 발표를 보면 윗선·증거·주인·배후가 없다고 한다”며 이를 규탄했다. 이어 “이 정권은 민간인을 사찰하고, 가짜편지로 국민들을 속이고, 국민의 돈으로 대통령의 사저를 사들이고는 검찰을 통해 다 털고 도망가려 한다”고 맹비난했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oeul.co.kr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