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해 지휘권을 발동, 불구속 수사토록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지시했다. 천 장관은 언론을 통해 “지휘권 발동이 검찰과의 갈등은 아니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천 장관은 지난 13일 오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번 불구속 수사 지휘는 검찰의 인권옹호 정신에 충실하기 위한 법리적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서면 수사지휘라는 공식적 절차 말고 내부적으로 설득이나 조율이 불가능했느냐’는 질문에는 “검찰의 구속 의견에 법무장관으로서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은 지휘권 발동이라고 보고 있다”고 답했다. 일부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한 내부적인 조율은 없었다는 얘기다.그러나 천 장관의 이같은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현행법상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따르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을 공식 발동한 적은 아직까지 한번도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천 장관이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일방적으로 지휘권을 발동한 이면에는 속사정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제 두 사람은 이번 문제로 사전 조율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12일 전화로 40여분간 설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김 총장이 완강히 거부하자, 천 장관이 일방적으로 서면 수사지휘를 택한 것. 익명을 요구한 한 검찰 관계자는 “김 총장이 천 장관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집무실 밖까지 소리가 들린 것으로 들었다”고 귀띔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미 천 장관에 대한 적지 않은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김종빈 총장의 ‘함구’로 수면은 고요해 보였지만, 심해에서는 검사들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는 김 총장의 최근 행보만 봐도 짐작이 간다. 지휘권 발동 소식이 전해진 12일 밤 김 총장은 외부와 접촉을 삼간 채 칩거에 돌입했다. 취재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한사코 거절했다. 13일에 자신의 입장과 거취를 정리한 뒤 발표하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그러나 막상 13일이 되자 김 총장은 대답을 미뤘다. 당초 검찰 주변에서는 강 교수 불구속 지휘가 총장이 사퇴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점 등에서 `지휘 수용’ 쪽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관측했다. 장관의 정당한 법적 권한 행사에 항명한다면 검사동일체 원칙이 강조되는 검찰 조직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총장은 장고 끝에 일선 의견을 수렴해 며칠 뒤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카드를 꺼냈다. 지휘를 받는 처지이지만 총장 개인의 입장이 아닌 검찰 조직의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신중한 뜻도 있겠지만, 사실은 ‘무언의 항의’에 가깝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귀띔이다. 다음날 14일 김 총장은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천 장관과 검찰 사이의 앙금까지 완전히 제거됐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김 총장과 천 장관의 이번 지휘권 파동이 우발적이 아니다”면서 “그동안 내면에 감춰진 갈등의 일부가 외부로 표출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천정배 장관과 김종빈 총장의 갈등은 이번 한번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지난 8월에도 지휘권 문제로 불협화음을 겪었다. 천 장관이 “구체적 사건을 지휘·감독하겠다”고 하자 김 총장이 작심한 듯 “비합리적이면 승복하지 않겠다”고 맞받아친 것. 이후 갈등은 봉합됐지만,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검사들의 조직적인 반발, 즉 검란(檢亂)마저도 예상되고 있다. 천 장관과 김 총장의 문제는 현재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이해당사자에 따라 찬성과 반대의 뜻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열린우리당측은 일단 천 장관의 이번 지휘권 발동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천 장관의 지휘권 행사가 국민정서에 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법률적 판단에 입각해 법적 권한을 행사한 것인 만큼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천 장관과의 대립 각을 세웠다. 지난 12일 긴급의총을 열어 천 장관의 사퇴를 논의하는 등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맹형규 정책의장은 “대한민국의 체제와 정통성을 부정한 강 교수에 대해 법무장관이 검찰의견을 묵살한 것은 사법질서를 무시한 행태”라면서 “천 장관을 즉각 해임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석 suk@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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