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의 숨겨진 개헌 노림수

청와대와 한나라당 친이계가 본격적인 개헌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고 나섰다. 청해부대의 ‘아덴만 여명작전’ 성공의 탄력적 분위기를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다. 개헌 드라이브의 선봉장을 맡은 인사는 이재오 특임장관. 지난 해 7·28 재보선에서 ‘낮은 자세’로 민심을 얻었지만 이번 개헌 추진을 바라보는 민심은 냉랭하다. 서민경제는 뒤로 제쳐놓고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혈안이 돼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온다. 차가운 여론에도 불구하고 개헌추진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대 국민적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까지 개헌 추진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오 장관의 노림수를 들여다봤다.
개헌에 ‘올인’한 이 장관은 연일 고군분투 중이다. 개헌의 당위성을 피력하기 위해 개헌 의원총회까지 열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지난 2월 8일 한나라당은 사흘간 일정으로 개헌 의원총회에 돌입했으나 이틀만에 끝이 났다. 첫날 참석한 의원은 모두 130여명. 외관상으로 보면 일단 성황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치열한 토론은 벌어지지 않았다. 친이계 의원들은 수십 명 떼 지어 나와 개헌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나섰지만 반대의 중심에 서 있는 친박계 의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개헌 선봉장’인 이 장관은 불참했으나, 자신의 트위터에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측면 지원을 했다. 박근혜 전 대표 역시 이번 의총에 불참했지만 전체 50여 명의 친박계 의원들 가운데 31명이 참석했다.
한나라당 지도부 ‘개헌 공론화’ 시도
이날 당 지도부는 개헌 공론화를 시도하며 세몰이에 나섰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한나라당은 2007년 4월 13일 의총에서 ‘18대 국회에서 국회가 주도해 4년 중임제를 포함한 모든 개헌논의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개헌에 관한 4대 원칙을 만장일치로 당론으로 채택했다”면서 “오늘 의총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수 대표도 “개헌 논의는 제한 없이 광범위하게 진행돼야 하고, 정파적 이익에 상관없이 개인이 헌법기관으로서 양심과 소신에 따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공개 의총에서는 친이계 의원들이 잇따라 개헌론을 설파했다. 발언에 나선 22명의 친이계 의원 가운데 첫 주자로 나선 이군현 의원은 먼저 2007년 4월 11일 17대 국회 여야 원내대표들이 ‘개헌 문제는 18대 국회 초반에 처리하기로 한다’며 서명한 합의문을 의원들에게 나눠 주며 개헌 약속을 상기시켰다. 박준선 의원은 “단임의 현 대통령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부담이 너무 크다”며 권력구조 개편론을 펼쳤다. 고승덕 의원은 개헌 반대론자들의 ‘개헌보다는 구제역·물가 등 민생을 먼저 챙길 때’라는 논리와 관련, “구제역 때문에 개헌을 못한다면 우리나라 소가 살아있는 한 개헌은 못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반면 개헌에 반대하는 김문수 경기지사의 측근 차명진 의원은 “권력구조에 손을 대려면 대통령이 직접 제안해야 한다”면서 “대통령이 ‘해보니까 안 되더라. 고쳐야겠다’는 결단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혁성향 초선 의원 모임 ‘민본21’의 공동간사인 김성태 의원은 “지금 민심의 요구는 개헌이 아니라 민생과 관련된 현안 문제”라고 꼬집었다.
친박계인 서병수 최고위원은 의총 뒤 기자들과 만나 “개헌이 야당과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해 실현 가능성이 없는데도 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4시간 동안 진행된 의총에서 친이계 위주의 개헌론 주장이 주를 이루자 “3일 동안이나 개헌 용비어천가를 부를 필요가 있느냐”는 등의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친박·중립, “개헌 반대, 해볼테면 해봐라”
부산·경남 지역 출신 일부 의원들은 “우리에겐 개헌보다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문제가 더 급하다”며 의총장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의원들은 고작 50여 명에 불과했다. 다음날인 2월 9일 진행된 의총은 전날보다 썰렁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처음 참석자는 70여 명에 불과했으나 친이계 의원들이 의총장에 들어서면서 참석자는 113명을 채웠다.
2차 개헌의총장 역시 친이계의 개헌 주장이 이어졌다. 발언대에 선 18명이 대부분 친이계였다. 반면 전날 토론에 나서지 않았던 친박계에서도 발언자가 나왔다. 이해봉·이경재 의원이 “당이 모처럼 계파갈등을 극복한 상태인데 (개헌으로) 새 갈등을 초래하면 누가 책임질 거냐. 국민적 동의도 없다”고 반대 토론을 했다. 토론 도중 강명순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가) 유신헌법 시절 청와대에서 편히 먹고살았다. 박 전 대표도 의총에 나와 개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 격인 이학재 의원이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반박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이틀간의 의총은 김무성 원내대표에게 개헌 논의를 위한 당내 특별기구 구성을 맡기자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의총은 친이계의 일방적인 주장과 친박계의 무관심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의총에서 동력이 확인되지 않은 개헌 논의가 당내 특별기구에서 힘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친이계 일부에서도 개헌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중립 의원들도 회의적이다. 권영세 의원은 “주류란 분들이 권력집중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3년간 권력집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친박계는 특별기구 참여에도 시큰둥한 분위기다. 특위 자체가 ‘반쪽 기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의 관심도 없는 개헌 논의가 특별기구를 꾸린다고 무슨 추동력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개헌, 국민상대 박근혜 압박용
이번 의원총회에서 드러났듯이 개헌은 친박계는 물론, 친이계와 중립의원들 사이에서도 부정적 기류가 확산돼 추진 동력이 상실됐다. 그렇다면 당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장관을 필두로 한 청와대와 여권 친이계가 개헌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는 여권에서 개헌 이라는 무리수를 두는 것은 레임덕 방지 차원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개헌론을 통해 정치권의 국정 이슈들을 묻어야 대통령이 후반기에도 국정을 장악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이 장관은 최근 주변에 “개헌론이 좌초되면 이 대통령도 (레임덕에 들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장관의 개헌론은 차기 대권 경쟁에서 압도적 지지율 차이로 1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국민 상대로 박 전 대표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개헌 외에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다.
이 장관은 박 전 대표의 소신으로 알려진 대통령 4년 중임제는 수용하지만 분권형으로 개헌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추후 정권을 거머쥐더라도 권력을 나눠가질 수 있어 친이계 입장에서는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이 장관은 최근 주변에 “앞으로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은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현재의 대통령제를 계속하면 설령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야당 및 당내 비주류와의 반목(反目)이 필연적으로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한편에서는 이 장관의 목적은 개헌이 아니라 개헌을 활용해 친이계의 결속을 꾀하려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여권 일부 인사들에게 내년 총선 공천과 관련, “시대정신에 맞는 인사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최근 일부 여권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내년 총선에서) 시대정신과 시대흐름에 맞는 참신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게 좋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치른 16대 총선 및 15대 총선 때 이른바 ‘젊은 피 수혈’과 ‘세대교체 공천’을 추진해 새 인물들을 대거 정치권에 영입한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4월 재보선 ‘개헌 심판의 장’?
이 같은 보도는 이 대통령이 지난 1일 방송좌담회에서 ‘연내 개헌’을 촉구한 이후에 나온 것이어서, 이 대통령이 내년 총선 공천권을 무기로 개헌에 미온적인 상당수 친이계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즉, 이 대통령의 복심인 이 장관이 추후 당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장관은 차기 총선 승리를 위해 친이계 결집에 나섰고, 이를 위해 개헌을 활용하고 있다는 수식이 성립된다.
친이계 일부는 성사 가능성과 상관없이 차기 총선 공천 문제 때문에 개헌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0~60명의 의원들이 뭉쳐 분권형 개헌을 계속 주장하면서 다음 총선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이재오 장관이 당권에 도전해 공천권을 행세할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개헌에 대한 여론이 냉랭한 데다 친박계는 발을 빼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더 이상 공론화 해봐야 득 될 것 없다는 식이다. 이 때문에 개헌의총에 이어 개헌특위도 썰렁한 ‘그들만의 리그’가 재연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다.
친이계 내부의 ‘개헌 군불떼기’ 역시 분위기가 달아오를 기색이 없다. 특히 4월 재보선에서 패배할 경우 개헌론은 급속히 사그러들 전망이다. 4월 민심이 개헌 심판의 장으로 흐를 공산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친박계가 개헌특위에 참여할 가능성도 낮다. 무엇보다 개헌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고, 특위 참여가 무의미하다는 게 대체적인 친박계의 시각이다. 무엇보다 당내 차기 유력한 대권 주자인 박 전 대표가 개헌관련 발언을 자제하는 이상 개헌파고는 낮을 수밖에 없다.
반개헌파 “대통령 임기 단축 전제 논의가능”
야권에서도 개헌을 보는 시선이 따갑다. 민주당은 진작부터 ‘정략적이다’, ‘시기가 부적절하다’며 개헌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도 개헌에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솔솔 흘러나온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가 최근 여기자들과 비공개 오찬에서 “이 대통령도 개헌 접었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친이계는 이에 개의치 않고 개헌안 도출에 주력할 방침이다. 개헌반대파에선 이 대통령이 ‘임기를 줄여서 4월 총·대선을 치룬다면 모를까 물건너 간 얘기’라고 역으로 청와대를 압박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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