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의원이 본 정치 30년 첫번째 이야기 3당 합당편 ① -황금 분할이 남긴 것은
장경우 전의원이 본 정치 30년 첫번째 이야기 3당 합당편 ① -황금 분할이 남긴 것은
  • 장경우 전 국회의원 
  • 입력 2011-01-31 12:35
  • 승인 2011.01.31 12:35
  • 호수 875
  • 3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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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 13대 국회 원구성에만 두달 걸려

미술에서 흔히 ‘부감법(俯瞰法)’이라는 용어가 있다. 높다란 곳에서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부감으로 높이서 넓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분노하거나 슬퍼할 일이 적어질 테지만 우리들은 아직도 이 ‘아래’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작은 일에도 목숨을 걸 듯 매달려 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다.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분노하고 절망하고 그리고 목숨을 걸 듯 희망을 놓지 않고 뛰었던 일들이 자꾸 되새겨진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진지했고 열심이었다. 진실과 희망이란 말을 가슴에 품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지쳐서 쓰러지다가도 다시 시작했던 정치 이야기를 아직도 ‘아래’에 살기 때문에 시작할까 한다. “박타쑨트세르반타(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사실 법대 학생들이 입학하면 맨 처음 배운다는 이 말은 즐겨 쓰기는 하는데 지켜지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약속은 빌공(空)자 약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믿으려 하지 않는것 같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1류가 아니라 4류라고 한다. 그러나 흔해 빠진 4류의 이야기와 말에 진실과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독자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지난 정치 생활 중 무수한 약속들이 허공을 맴도는 가운데 보기도 많이 보았고 경험도 숱하게 쌓았다. 점차 그 약속이 지켜지고 이행되는 정치권을 좀 더 빨리 보고 싶다는 심정으로 이글을 쓴다.

필자는 11,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우리 정치사에 처음 있었던 ‘황금 분할’부터 이야기의 첫 머리로 쓰고자 한다. 13대는 국회사상 최초의 ‘이변’이 시작된 선거의 결과 였다. 4당 체제를 탄생 시켰고 ‘여소야대’의 국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이변’은 긍정적인 측면으로든 부정적인 측면으로든 연구 대상임이 분명하다. 헌정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그것도 야3당이 국회를 주도했던 청문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3당 합당’이라는 엄청난 거대 여당을 만들어 큰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그리고 ‘호랑이 잡으러 굴에 들어간다’는 김영삼 전대통령은 당시 불과 50여명의 소수계파를 이끌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이 4년여의 숨가쁜 변화는 과연 우리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한가운데서 변화의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나가야만 했던 경험들을 기록해 놓고자 할 뿐이다.


황금 분할의 서막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나는 12대 국회 공천을 받지 못했고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고 ‘일구월심(日久月深)’ 안산에서 열심히 뛴 결과 13대 때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무난히 당선 되었다. 나머지 3명의 후보들의 표를 모두 합산해도 내가 얻은 표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결국 안산에서의 압도적인 지지는 이후 나의 의정 활동에 상당한 자신감과 재산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나의 압도적인 당선과는 달리 당시 ‘민정당’은 여당으로써 13대 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겨우 120여석(전국구포함)이 당선 되어 과반수 299석(지역구 224, 전국구 75)에 훨씬 못미치는 결과였다.

사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민정당 내에서는 “너무 많이 당선 될까봐 걱정”이라는 말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떠돌았다고 한다. 87년 대선을 통해 당선 된 노태우 대통령의 인기(6·29선언 등)의 기대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러한 여소야대를 두고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황금분할’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함으로써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뒷날 생각해 보면 그 ‘황금분활’은 다가올 태풍의 서막이었다고나 할까. 어떻든 전국은 국회 개원 초부터 숨가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회를 개원하는 데에만 엄청난 토론과 밀담과 각종 회합이 필요했다. 당시 각당의 원내 총무(지금의 원내 대표)도 막강 했다.

고인이 된 민정당 김윤환 의원을 비롯해 평민당 김원기 의원, 통일민주당 최형우 의원, 공화당 김용채 의원이었다. 당시 민정당 의원들의 구성은 주로 초선 의원이 대부분이었고, 3선 이상의 고참 의원들이 약간 있었지만 재선 의원이 드물었다. 결국 재선인 필자는 원내 부총무 겸 의원실장을 맡아 김윤환 총무 밑에서 의원들의 살림부터 출석 이석 등을 확인하고 챙겨야 되는 그야말로 잡다한 일을 도맡게 되었다.

‘여소야대’이다 보니 각 상임 위원회 마다 ‘여소야대’가 대부분이었고 일부 위원회(당이 중요하다고 판단된 상임위원회)의 과반수 확보가 우선 이었고 대부분의 상임위는 대체로 ‘여소야대’였다. 이때 최초로 야당의 상임 위원장의 탄생이 시작되었고 야당의 의원 비율에 따라 상임위원장 자리를 나누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에 여당이 반드시 차지해야 되는 상임위원회가 생기게 되었다.

말은 ‘여소야대’다 ‘황금분할’이다 ‘민주주의의 승리다’ 했지만 사실 모든 정치인들이 ‘여소야대’의 경험이 없다보니 국회의장 선출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국회 개회식과 의원선서가 있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국회 구성이 끝나고 개원이 되었으니, 이것도 대한민국 국회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당시는 각 당이 원내 총무를 돕기 위해 4~5명의 부 총무를 두어 원내 대책을 세워 나갔다.

당시 민정당 부총무로는 정창화 의원, 고인이 된 김진재 의원, 박희태(현, 국회 의장) 의원, 신경식 의원, 그리고 필자였다. 그 후 함종한 의원과 유수호(현, 유승민의원 부친) 의원도 추가로 임명되어 함께 일했다.

[일요서울]이 장경우 전 의원의 정치 회고록을 연재합니다. 1981년 11대 의원에 당선된 이후 정치 일선에서 활약해 온 장 전 의원이 본 파란만장한 정계 30년에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프로필
●1942년 4월 12일생
●경기중·고/고려대 경영 졸
●대한축구협회부회장
●대한수영연맹 명예회장
●제 11.13.14 국회의원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현)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 아·태 지역위원회 의장(현)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chang21@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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