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이전부터 반(反)박근혜 세력에선 “잘해도 본전치기”라며 박 대표의 대권 입지를 축소해왔기 때문이다. 이와 맞물려 이명박 서울시장의 당권 진입을 향한 보폭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재·보선 기간을 기점으로 장외 주자들 진영에서도 정치권과의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가장 먼저 선거 결과의 격랑에 휩싸인 곳은 열린우리당이다. 현지도부 체제 이후, 연이은 선거의 패배는 ‘위기론’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당원 및 정치권 인사들은 ‘지도부 책임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세를 모으고 있다. 여권이 받고 있는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조기 전대 경선 전초전
4·30 재·보선 23대0에 이은 두 번째 완패. 문희상 의장 등 여당 지도부는 “누가 치렀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며 선거 결과의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으나, 그들을 향하고 있는 비난의 화살을 비켜갈 수 없다. 문 의장의 11월1일 미국 방문 일정도 현 격랑을 피하기 위한 도피성 외유로 비칠 정도였다.새 지도부 구성을 바라는 여당의 고민은 결국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의 당 복귀론으로 모아진다. 지금까지 지도부를 압박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 역시 정 장관, 또는 김 장관 측근의원들이 상당수다. 이들은 재·보선 이전부터 현지도부의 무능함을 꼬집었으며, 4월 재·보선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 지도부 책임론에 불씨를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완패라는 결과에 힘입어 대선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지방선거 이전 입각 주자들이 당에 귀환해야 한다는 이들의 요구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지방선거 출마를 타진하고 있는 김 장관과 정 장관의 측근의원들은 노골적으로 지도부를 몰아세우고 있다. 물론 이는 예견됐다는 게 여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여당 한 핵심 당직자는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예비 후보들과 입각 주자들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현지도부에 대한 문책성 불만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당 복귀와 관련 ‘조기 복귀’가 아니라는 입각 주자들측의 강력한 해명에서도, ‘정동영-김근태’ 장관의 정치권 복귀는 연말연초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입각 주자들의 당 복귀 절차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재·보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지도부 체제는 유지하고, 입각 주자들은 지방선거와 관련 상임고문 및 공동선대위원장 등의 역할론으로 모아졌다.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벌어질 이른 대권 경쟁을 피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던 것이다. 차기 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당내 역학구도에 변화가 온다면 당 존립도 위태로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재·보선 결과는 완패.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의 전초전이라는 성격이 짙은 조기 전당대회의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게다가 당내 일각에선 계파간 주도권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청와대가 주도한 당·정·청 관계를 대폭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대권 경쟁이 입각 주자들의 당 복귀와 맞물려 진행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한 것은 아니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승부수’가 던져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여당이 추천하는 국무총리에게 국정을 위임한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연정의 또 다른 형태로 정치권 지각변동이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는 양자 구도로 굳어진 여권 대권 레이스가 제 3의 인물군을 영입, 다자 구도로의 변화가 감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남권 이상기류 조짐
지도부 책임론이 일고 있는 여당에 비해 한나라당은 박근혜 체제가 더욱 공고화될 전망이다. 청계천 완공을 기해 이명박 서울시장 쪽으로 흐르던 여론의 향배도 일단 차단했다는 평가다. ‘노무현-박근혜’ 대리전으로 까지 비화됐던 대구 동을 선거에서 노 대통령의 최측근 이강철 후보를 상대로 낙승한 대표비서실장 유승민 후보의 선전은 박 대표의 처지에서 고무적인 결과다. 또한 홍사덕 전 의원의 무소속 출마 등 공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경기 광주 선거, 잠시 잃어버렸던 울산 북 선거도 박근혜 체제의 순항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호(號)에 부는 순풍은 지방선거 이전, 더 앞당겨 연말연초까지라는 관측이 대세다.
박 대표 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될지는 더 지켜볼 일이라는 것. 4대0이라는 대승을 거뒀으나, 재·보선 이전 “잘해야 본전치기”라는 압박을 가했던 반박세력의 공격이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는 시점,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금산법, 부동산 관련 법, 내년도 예산을 둘러싼 감세논란 등 그동안 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에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쟁점에 있어 양당의 대립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며, 반박세력이 이를 역이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박풍(朴風)의 진원지가 선거라는 점에서 재·보선 결과는 ‘길어야 3개월’ 등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견해는 이미 알려진 바다.이러한 분위기는 박 대표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영남권에서 먼저 감지되고 있다.
여야 정쟁의 틀에 갇혀 있는 박 대표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의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묘한 변화의 기류엔 초선은 물론 중진 의원들도 가세할 조짐이다. 특히 이들 영남권 의원들의 행보가 ‘이명박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영남권의 이상기류가 박 대표의 대선가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조심스런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박 대표와 경쟁관계에 있는 이 시장은 재·보선과 무관한 차별화 전략을 통해 대권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10월1일 청계천 완공을 기점으로 ‘대선 경선 불참’, ‘독자 신당 추진’, ‘후보 단일화 추진’ 등에 대한 정치권의 의구심에 쐐기를 박는 등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차기 주자들이 재·보선을 관망하며 여론 검증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여야를 통틀어 대권 도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유일한 예비 후보로 자리매김한 이 시장. 그의 이러한 모습이 영남권 민심을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편, ‘박근혜-이명박 후보 단일화’라는 이 시장의 언급은 차기 서울시장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사실상 당 밖에서 지방선거를 관망하고 있어야 하는 이 시장의 형편상, 후임 서울시장에 친이명박계 인사가 당선돼야 ‘서울-영남’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내 한 핵심 당직자 역시 “전반적으로 영남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박 대표를 겨냥하고 있는 듯하다”는 진단이다.
이회창 전총재 복귀에 촉각
재·보선 결과를 지켜본 장외 주자들의 움직임도 정치권의 관심 대상이다. 먼저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및 권철현 의원의 아들 결혼식을 이유로 부산에 다녀온 이후 지난 대선 핵심 브레인으로 참여했던 유승민 후보의 지원 유세차 대구를 찾은 이 전총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관측이다. 정계복귀라는 정치적 해석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미소를 띠며 외부 활동에 열심이 나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여론 검증을 통해 대선 도전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이 전총재의 골수 지지층이 형성돼 있는 부산을 비롯한 대구에서 이 전총재는 정치활동 재개 및 대권 도전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를 받고 돌아왔다.
특히 ‘창사랑’ 등 노골적으로 그의 대권 도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단체들과 발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게다가 유승민 후보의 선전은 이 전총재의 대권 도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셈이 됐다. 그의 재·보선 투입에 앞서 박 대표가 이 전총재에게 ‘허락’을 구했을 정도로, 유 후보는 지난 대선때 이회창 후보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인사다. 특히 창사랑의 근거지가 대구라는 점에서 유 후보의 향후 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결국 이번 재·보선은 이 전총재에게 정치 재개라는 기회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여전한 이 전 총재의 건재함은 증명됐으며, 이를 통해 당내 진입의 발판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도 정치권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다.
한편, 고건 전총리 주변에선 재·보선 이전부터 대선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팬클럽인 ‘우민회’가 그의 대선 조직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를 부인한 고 전총리지만, 사실 그의 말이 정치권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민회는 벌써부터 시군구별 지역 조직을 결성,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조직팀, 기획팀, IT관리팀 등 대선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대권 도전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장내 주자인 이 시장의 실질적인 대선캠프라 할 수 있는 정무팀은 몇몇 핵심인사들이 투입돼 가동되고 있는 것에 견줘 고 전총리의 우민회는 ‘창당’ 수준으로 비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이러한 정황상, 이 전총재 및 고 전총리 등 장외 주자들 역시 장내 주자들과 행보를 같이할 것으로 관측된다. 대선 전초전 성격을 띤 지방선거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 일정상 2006 지방선거 착수는 정기국회가 끝나는 때인 내년 초가 될 것이며, 이들의 신경전이 막을 내리는 시점은 이에 앞선 연말쯤이 될 것이라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금미 nicky@il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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