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ㅣ정찬대 기자] 현 정권의 민간인 사찰이 점입가경이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주도한 민간인 불법 사찰은 정권 말 초대형 권력형 비리 게이트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현 정부의 조직적 증거인멸 의혹을 폭로한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의 양심발언이 민간인 불법 사찰이 알려진 단초가 됐다. 그는 청와대로부터 입막음용으로 받았다는 5000만 원의 관봉 사진을 검찰이 미복원하자 스스로 사진을 복원해 검찰 수사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번 사찰 사건은 민간인뿐만 아니라 전현직 고위 공직자, 정재계 인사를 비롯해 현 정권에 비판적인 일부 연예인들이 포함돼 있으며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의 동기와 공공기관장까지 그 대상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면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급기야 야권은 물론 여권 진영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619건의 사찰 기록을 담고 있는 불법 사찰 문건은 현재까지 공개된 내용만도 3000페이지에 달한다. 여기에 민주통합당 이석현 의원은 민간인 사찰에 개입한 일부 직원이 사찰 관련서류들을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며 사찰 문건이 6박스 가량 더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찰 대상에 포함된 인사 가운데 참여정부 시절 고위 관료를 지냈거나 실세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현 정부의 전 정권 인사 흠집 찾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민간인 사찰’, 어떤 내용 담고 있나
[일요서울]이 최근 입수한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일부 사찰 문건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 산하 공기업 GKL(그랜드코리아레저) 박정삼 초대 사장(전 국가정보원 2차장)과 임직원들에 대한 사찰이 집요하게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으며, 총리실(사찰팀)은 박 사장 이외에도 GKL의 팀장급 이상 임직원들의 뒷조사를 진행한 뒤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삼 전 사장과 GKL에 대한 동향·현황·첩보 보고만 17건에 이른 가운데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박 사장은 카지노 보안 시스템 업체를 선정하면서 대규모 입찰임에도 조달청에 의뢰하지 않고 직접 입찰을 실시해 ○○업체가 선정됐으며, 110억 원이면 가능한 사업을 220억 원에 계약하여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것이라는 후문”이라고 적시했다.
또한 “카지노 영업장 설계 용역을 발주하면서 외국 업체와 합작을 필수항목으로 삽입해 특정업체를 선정했다는 소문”이라고 기재하는 등 ‘소문’ ‘후문’ ‘설’(說)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 2008~2009년 사이 이뤄진 사찰 중 상당 부분이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 공기업 임원들을 해고하는 근거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공기업 사퇴현황이 ‘BH(청와대) 하명’이라는 표기가 기재돼 있어 전 정권 인사에 대한 현 정부의 사퇴압박을 가늠케 하고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이세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김광식 전 한국조폐공사 감사·김문식 전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장·박규환 전 소방검정공사 감사 등이 사찰 대상에 포함돼 있으며, 이들 모두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비판적인 인사뿐만 아니라 이미 구속된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및 홍문표 전 농어촌공사 사장 등도 사찰 명단에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찰에 포함된 이들을 살펴보면 현직 정치인도 일부 포함돼 있다. 민간인 사찰 의혹이 처음 불거진 지난 2010년 남경필 새누리당 의원과 그의 부인에 대한 사찰은 이미 세간이 알려진 바 있으며, 대표적 ‘친박계’ 의원인 이혜훈 의원을 비롯해 민주통합당 김유정 의원에 대해서도 사찰이 진행됐다.
김유정 의원은 2009년 용산참사와 관련한 국회 긴급현안 질문에서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이 경찰 홍보담당관실에 보냈다는 ‘군포 살인사건을 용산사태의 확산을 막는데 적극 활용하라’는 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이밖에도 김옥영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은 정치후원금 50만 원씩을 3명의 국회의원에게 납부했다는 이유로 사찰 대상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른바 좌파 연예인이라 불리는 김미화·김제동 씨 등에 대해서도 사찰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인과 공직자를 가리지 않고 불법 사찰이 이뤄진 것이다.
방송인 김미화 씨는 지난 3일 MBC노조가 제작하는 ‘제대로 뉴스데스크’와 인터뷰에서 2010년 국정원 직원이 자신을 두 번 찾아왔었다고 밝혔다. 그는 “‘VIP’(대통령)가 나를 못마땅해 한다고 말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찰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이에 “사실이 아니다”며 김 씨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착수했다.
靑 “문건의 80%는 전 정권에서 이뤄진 것”
민간인 사찰사건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사찰 문건의 80%는 노무현 정권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금락 홍보수석은 지난달 31일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민간인 사찰 문건 2600여건 가운데 2200여건 가량이 노무현 정부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이어 다음날인 1일에는 참여정부에서 이뤄진 민간인 사찰 사례를 직접 언급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공개된 문건 2619건 가운데 2200여 건이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2007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을 지낸 조영택 의원은 “지난 정권에서 민간인에 대한 사찰이라든가 조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민간인이 있다면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경우에 한정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조 의원은 지난 2007년 전국 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회 등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청와대 측 자료와 관련해 “당시 정보관련 유관기관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씩 첩보나 제보 등을 주고 받는다”며 “청와대가 제시한 자료가 단순히 정보차원 수준의 자료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고 반박했다. 즉, 노무현 정권의 ‘직무감찰’을 ‘불법 민간인 사찰’인 것처럼 물타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민간인 사찰, ‘몸통’은 누구인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관련해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에게 입막음용으로 건넸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현금 5000만 원의 돈다발 사진이 공개됐다.
조폐공사가 한국은행으로 돈을 보낼 때 정부의 도장을 찍어 봉인한 ‘관봉’ 형태의 돈뭉치로 시중은행에서 곧바로 인출된 것으로 알려져 입출금 경위를 추적하면 입막음 공작의 배후를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당초 이 돈을 건넨 이는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으로 류 전 관리관은 “장 전 주무관을 돕기 위해 총리실에서 십시일반 모은 돈”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지난 5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돈”이라고 말을 바꾸면서 이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 검찰도 이에 대한 수사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에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 증거인멸을 지시한 혐의(증거인멸교사)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 최종석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을 구속하면서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이 전 비서관이 증거인멸 지시 외에도 불법사찰에 적극 개입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장진수 전 주무관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찍은 후 곧바로 삭제한 5000만원의 관봉 사진을 검찰이 미복원한 점 등을 들며 스스로 ‘윗선’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 아니냐며 검찰의 수사의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새누리당 이상돈 비상대책위원은 지난 5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은 닉슨 대통령이 물러난 워터게이트 사건과 판박이”라며 하야까지도 가능한 사안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민간인 사찰을 사전에 인지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사유는 그에 비해 오히려 경미한 것으로 불수 있다”며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새누리당은 민간인 사찰사건과 관련해 야당에 특검을 제안한 상태이며,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야권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검으로는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힐 수 없다며 청문회를 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