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는 없다 제 46 화
빙의는 없다 제 46 화
  • 인터넷팀 기자
  • 입력 2012-04-03 17:44
  • 승인 2012.04.03 17:44
  • 호수 924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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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자신을 찾아간 대감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환생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과학적으로 그것을 검증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일타(日陀) 큰스님이 『석왕사기』에서 인용하여 쓴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란 책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전해진다.

귀양살이 대감 미래를 짚어 보니…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은 조선시대 고종임금 당시 대감이 됐다. 그 당시는 대원군과 민비 사이의 전쟁이 한창일 때였고, 일본의 대륙 진출, 청나라의 국위회복, 러시아의 남진정책 등 열강들의 침략정책에 휘말려 국내 정세의 혼란은 극을 달리고 있었다.
윤웅렬은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단행할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변의 실패로 전라도의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가 능주에서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잔심부름을 하는 상노가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와서 수다를 떨었다.
“대감님! 저 아래 마을에 명두(마마를 앓다 죽은 어린 여자아이의 귀신 또는 태주라고도 함)가 있는데 앞일은 무엇이든 아주 잘 맞힌답니다. 먼 육지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서 묻곤 하는데 족집게라 합니다. 한번 가서 물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윤 대감은 미신이려니 하면서도 앞날이 너무나 궁금하고 유배지의 생활이 갑갑하여 심심풀이 삼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상노를 앞세우고 태주의 집에 다다른 윤 대감은 자리에 앉으며 점잖게 물었다.
“점하는 사람은 어디 있는고?”
그러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공중으로부터 어린아이의 목소리만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가! 내가 대관절 누구인데 여기 와 있는고?”
“영감님은 서울에서 오신 귀한 어른으로 귀양을 와 계십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풀려나겠는가?”
“별 죄가 없으니 보름 후 풀려날 것입니다.”
“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금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며, 언제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영감님의 자제는 미국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역시 유학 온 청국의 여인과 약혼을 하여 내년 가을 상하이에서 결혼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전에 대감님 부자가 상봉을 하시겠습니다”

“대감님의 전생은 승려였소”

윤웅렬 대감의 아들은 윤치호(1864~1946)이다. 유명한 정치가로서 당시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있던 때였다. 윤웅렬 대감은 태주가 자기의 신상이나 아들에 대해 알아맞히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흔히들 전생이 있다고 하는데 ‘나의 전생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물어 보자 태주는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다녀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감님의 전생은 승려로서 법호는 해파요, 승명은 여순이었습니다. 함경도 석왕사에서 열심히 증진하였기 때문에 그 공덕으로 중국에 태어나 일품 대신으로 큰 공로를 세우며 부귀하였고, 그 다음인 금생에는 조선에 태어나 귀한 자리에 오르셨고, 장차 군부대신이 될 것이며, 오복을 구족하여 부귀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전생에 함께 출가한 형은 스님 노릇을 아주 잘못하였습니다. 법당을 증수한다, 개금불사를 한다고 하면서 모은 시주금을 함부로 써버렸고, 부처님의 삼보정재를 도둑질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 고초를 받다가 이제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았지만 가난한 과보를 받아 끔찍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강원도 통천에서 술장사를 하면서 사는데 술집 이름은 ‘새술막이’라 하고 이름은 이경운이라 하며 두 손이 모두 조막손입니다.”
그 뒤 윤웅렬 대감은 태주의 예언대로 유배지에서 풀려나 가족과 아들 윤치호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전생이 석왕사 스님이었다는 태주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광무 7년인 1903년, 아들 윤치호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안변 석왕사를 찾아갔다.
수군당이라는 요사체에 숙소를 정한 그 이튿날, 산중 스님들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 ‘해파 여순이란 스님이 100여 년 전 이곳에 있었는가, 그 권속이 누구이며 그 스님의 행장을 아는 이가 있는가’ 등을 확인해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 시절 과거를 찾아서

‘과연 전생이란 없는 것인가’ 대감은 태주의 말을 믿은 자신이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태주의 말대로 보름 있다가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그 이듬해 가을 아들이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하여 부자가 상봉한 일, 자신이 군부대신에 오른 일 등을 생각하며 산 중의 원로이신 설하 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답답해하던 차에 뒷산으로 사냥을 하러 갔다. 산꼭대기 바로 밑의 행적골 속으로 노루를 몰아넣고 수행원을 인솔하며 뒤쫓다가 내원암 입구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바로 그 눈앞에 부도가 일렬로 서 있는 것이었다.
윤웅렬 대감이 무심코 일어나 단장으로 수풀을 헤치자 한 부도에 새긴 글자가 눈에 띄었다.
‘해파당 여순’
윤웅렬 대감은 일행을 데리고 석왕사로 돌아가 대중 스님들을 모아놓고, 능주에서 점친 일들을 설명하자 대중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인터넷팀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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