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Ⅰ최은서 기자] 해커스그룹의 토익(TOEIC) ‘족집게 강의’는 ‘스타 강사’의 작품이 아니었다. 첨단기기와 직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토익과 텝스(TEPS) 시험 문제를 불법 유출한 것이 족집게 강의의 비결이었다.
이들의 ‘시험문제 빼내기’는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마이크로렌즈가 장착된 만년필형 녹화장비와 특수 제작한 녹음기를 이용할 만큼 수법이 치밀했다. 이에 대해 해커스그룹 측은 방법상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기출문제 복기는 출제 경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문제와 정답을 공개하지 않는 토익 주관사 미국 교육평가원(ETS)도 이번 문제유출 사태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구원·직원 총동원해 조직적으로 토익·텝스 문제 100여회 유출
해커스 “정보 독점 정당화시켜 수험생 알 권리 침해하고 있다”
‘족집게 어학원’이라는 명성을 타고 초대형 어학교육그룹으로 급성장한 해커스그룹 임직원들이 검찰에 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부장 김영종)는 해커스그룹 조모(53) 회장 등 임직원 6명을 토익·텝스 영어시험 문제를 상습적으로 불법 유출한 혐의(저작권법 위반 등)로 불구속 또는 약식 기소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검찰은 또 해커스 어학원과 해커스어학연구소 등 2개 법인도 같은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해커스그룹은 조직적으로 시험문제를 불법 유출해 설립 9년 만에 연 매출 1000억 원, 당기순이익 360억 원을 거두는 국내 최대의 어학교육 그룹으로 올라섰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커스 그룹과 일부 수험생들은 “문제도 정답도 철저히 비공개에 부치는 토익시험이 오히려 더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 문제 유출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영어실력을 높이는 것보다는 단기간에 족집게 강의로 어학 성적을 올리는 데 치중된 한국 사회의 기형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6년 NEAT 시험도 대비
해커스그룹은 직원과 연구원 50여 명을 동원해 2007년부터 2012년 1월까지 토익과 텝스 시험문제를 모두 106차례에 걸쳐 외부로 유출했다. 토익은 2007년 10월 28일부터 2011년 12월 18일까지 49회, 텝스는 2007년 12월 2일부터 2012년 1월 7일까지 57회에 걸쳐 시험문제를 유출했다.
수년간 조직적으로 문제유출이 이뤄진 데에는 조 회장의 치밀한 계산이 한몫했다. 이미 조 회장은 어학 수험생들 사이에서 ‘전설적 족집게 강사’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가명을 사용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조 회장은 학원가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2년 해커스 어학원을 설립했다.
조 회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지방 국립대 영문과 교수라는 사실이 탄로났다. 공무원의 영리업무 및 겸직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
특히 조 회장은 비상장 법인인 해커스그룹 주식을 100% 소유한 채 각종 시험문제의 유출방식부터 사이트 게제 방법까지 범행 전 과정을 주도하고 개입했다.
조 회장 등은 사전에 연구원·직원 18~20명에게 독해·청해(듣기) 등 파트별 암기부분을 할당해줬다. 독해는 각 연구원들이 암기를 부여받은 2문제만 외우고 시험이 끝난 후 1시간 30분 이내에 인터넷으로 총괄자에게 전송하도록 했다.
암기가 어려운 듣기의 경우 문제 암기만을 위해 어학원에 채용된 직원이 동원됐다. 이 직원들은 특수 제작한 소형녹음기를 통해 듣기평가를 몰래 녹음해 외국인 연구원에게 3시간 이내에 전송했다.
이들은 해외에서 구입한 특수 녹음기를 변형해 헤드폰과 귀 사이에 끼우는 방법으로 녹음하고, 영상 녹화를 위해 마이크로렌즈가 장착된 만년필형 녹화장비를 이용하는 등 수법도 치밀했다.
연구원과 직원들이 유출한 시험문제는 해커스학원 내부통신망(인트라넷)의 마케팅팀 게시판에 취합됐다. 시험문제 지문과 정답은 각 시험총괄 담당자의 검토를 거친 뒤 다음날 오후 6시까지 시험문제가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단속에 대비하기 위해 각자의 파일 및 내부통신망에 일일이 암호를 부여해 철저히 관리했다. 이후 해커스어학원 웹게시판에 번호와 정답을 게시한 뒤 다음날 오전에 홈페이지에서 삭제하고 교재나 교재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저작권법 위반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2010년 9월 모 어학원이 토익기출문제를 무단 유출해 기소되자 어학원 사이트에 올리는 후기 문장을 최소화했다.
또 법무팀과 기출문제 변형 과정에서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도록 논의하는 등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했다. 이들은 유출 시험문제를 토대로 만든 예상문제로 높은 적중률·경쟁력을 갖추게 돼 업계 1위의 족집게 어학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 오늘 2016년부터 수능 영어 시험의 대체 여부를 검토중인‘니트(NEAT·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도 대비했다. 특수 녹음기와 초소형 카메라까지 동원해 NEAT 모의고사 시험문제를 유출한 것으로 조사된 것. 검찰은 “이들은 NEAT가 향후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토익이나 텝스는 수험생이 제한적이나 수능은 초·중·고생이 모두 준비를 하게 되므로 엄청난 시장 잠재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교육과학기술부는 "해커스그룹 관계자가 촬영및 녹음한 시험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지난해 7월 시행된 NEAT 1급 3차 모의평가로 토익 등의 시험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라며 "대학입학 시험에 활용하기 위한 학생용 2·3급 시범평가는 학교에 구축된 시험실을 활용하고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행했기 때문에 시험 문제 유출 사례는 없다"고 강조했다.
“ETS 불합리해”
검찰은 또 “이번 문제 유출로 ETS 측이 한국 수험생들의 영어 실력에 의문을 품고 한국인만을 위한 새로운 토익문제를 개발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심어졌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해커스그룹 측은 “토익 시험 응시를 통해 최신 기출 문제와 경향을 파악하고 이를 반영하기 위한 연구 자료로만 활용했다”며 “이번 검찰 수사는 영어시험 기출문제에 대한 시험출제기관의 정보 독점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수많은 수험생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결국 매달 학습자들의 시간과 비용이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커스그룹 측은 시험문제 유출이 빚어진 이유로 ETS의 기출문제·정답 비공개 방침을 지적했다. 해커스그룹 측은 “사법시험이나 한국어능력시험(TOPIK)과 달리 토익 등이 문제와 정답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수험생들도 “4만 2000원을 들여 시험을 보는데 내가 뭘 맞고 틀렸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 시험문제 불법유출은 어학업계에 퍼져있는 관행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토익 커뮤니티 등에서 ‘다른 학원 토익강사들도 조직적으로 문제를 외워 기출문제를 만들거나 유형을 파악했다’ 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 이 같은 점은 해커스그룹 측에서도 검찰 수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서 기자 choie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