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10일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

집권 여당의 전직 최고위원이 50대 남성으로부터 도끼로 피습을 당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광주서부경찰서는 박재순(66)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집에 침입해 박 전 최고위원을 흉기로 살해하려 한 윤모(56)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지난 12일 구속했다. 윤씨는 박 전 위원이 소송관계가 얽힌 자신의 민원을 해결해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조사결과 윤씨는 사건 발생 열흘 전부터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직 여당의 핵심 당직자와 민원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헤쳐 본다.
지난 10일 새벽 2시40분께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박재순 전 위원이 거주하는 A아파트에 ‘적색경보’가 울렸다. 박 전 위원이 자주 드나들던 광주시내 목욕탕에서 일하던 목욕관리사 윤씨가 손도끼와 대검, 가스총으로 무장하고 “죽여버리겠다”면서 찾아왔다.
윤씨는 낚싯대에 매단 로프 고리를 3층 가스배관에 걸고 기어 올라간 뒤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박 전 위원의 집에 침입했다. 윤씨는 곧바로 잠을 자고 있던 박 전 위원에게로 달려들었다.
인기척을 느낀 박 전 위원 부부는 잠에서 깼고, 손도끼를 손에 든 윤씨와 방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박 전 위원의 이마가 3cm 가량 찢어졌다. 박 전 위원은 이마에 출혈이 심해 인근 전남대병원에 실려가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용의자 자녀 셋 두고 때밀이와 구두닦이 생활
과거 여당의 핵심 당직자에게 ‘도끼 테러’를 감행하다 경찰에 붙잡힌 윤씨는 20여 년 전부터 광주 시내의 여러 목욕탕을 돌며 목욕관리사로 일해 왔다. 20세를 넘긴 딸 둘과 군대를 제대한 아들 하나를 두고 때밀이와 구두닦이 일을 번갈아 하며 생활해 왔다.
그러던 2008년 12월께 윤씨가 근무하던 목욕탕에 자주 드나들던 박 전 위원을 알게 됐다. 이 때 윤씨는 2006년 6월 광주지법에 한국도로공사와 B건설사를 상대로 제기한 11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법정 다툼의 발단은 한국도로공사가 발주한 남해고속도로 목포-장흥 간 건설공사에 윤씨의 땅이 포함되면서 부터다.
윤씨가 자신의 땅 4000평에 심었던 무궁화 6000여 주 가운데 일부가 공사 과정에서 무단으로 제거되자 발주처인 도로공사와 원청업체인 B건설사를 상대로 즉각 소송을 제기한 것.
1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법원은 “B건설은 윤씨에게 5900만 원을 지급하라”면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B건설은 항소했고, 윤씨도 항소로 맞대응 했다. 양측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자 법원은 2008년 12월, B건설이 윤씨에게 1억9500만 원을 지급하고 “윤씨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내렸다.
윤씨는 항소심에서의 법원 조정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던 찰나에 단골인 박 전 위원과 목욕탕에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윤씨는 박 전 위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뒤 박 전 위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윤씨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윤씨는 박 전 위원으로부터 ‘고위직에 부탁했으니 기다려라. 새 재판부가 구성될 때까지 조정 권유에 응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씨, 박 전 위원에게 봉황삼 선물
윤씨는 박 전 위원에게 봉황삼까지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봉황삼은 한 뿌리에 수천에서 수억 원 대에 거래되는 산삼 중의 산삼으로 알려져 있다.
윤씨가 박 전 위원을 만난 뒤에도 3차례의 조정과 6차례의 재판이 진행됐고, 결국 양측은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상태로 지난해 3월 선고공판이 열렸다.
그러나 윤씨의 항소는 모두 기각됐고,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원심대로 5900만 원만 지급받을 상황에 처한 윤씨는 이후 대법원 상고, 항소심 재심 청구 등에 나섰으나 모두 각하 또는 기각됐다.
분개한 윤씨는 이번엔 박 전 위원에게 화살을 돌렸다. 지난 4월 박 전 위원을 상대로 2억 원 대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 윤씨는 “박 전 위원의 말만 믿고 조정을 거절했다가 낭패를 봤고 각종 소송비용에다 정신적 피해까지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소송개입의 직접적 증거가 없고, 봉황삼을 건넬 당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선물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등이 명확하지 않다”며 윤씨의 소를 최근 기각했다. 결국 조정 결렬 후 수차례의 법적 대응이 모두 물거품이 된 셈이다.
경찰은 이번 ‘도끼 피습사건’이 여권 고위층을 과도하게 신뢰한 윤씨가 소송에서 잇달아 패소 하자 앙심을 품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관계자는 “윤씨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열흘 전부터 혼자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했다”면서 “일단 박 전 위원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윤씨의 진술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박 전 최고위원은 전남 보성 출신으로 산림보호직 서기보에서 출발해 1급 공무원까지 지냈으며, 한나라당 전남도당 위원장(2006~2008년), 한나라당 전남도지사 후보(2006년)를 거쳐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전성무 기자 bukethead@nate.com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