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졌다 하면 튀나, 줄줄이 해외로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있거나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정·재계 인사들이 몰염치하게도 수사나 국감을 피해 해외로 잇달아 출국하는 사태가 계속되고 있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한상률 전 국세청장 등이 대표적이다. 출장, 건강상 문제, 풍수지리 과정 수강 등 이유도 다양하다. 여기에 검찰이 주요 수사대상자들의 출국을 제 때에 금지시키지 못해 사실상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며 사회지도층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극으로 치닫고 있다. 사회지도층의 도덕불감증을 되짚어 봤다.
“돈만 있으면 아무도 못 잡는다?”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거나 국감 주요 증인으로 채택된 거물급 인사들의 도피성 해외 출국이 잇따르고 있다. 국민들은 “일단 조용할 때까지 해외로 튀면 그만 이냐”면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지난 10월 12일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는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강정원 전 국민은행장 등 KB 회장 선임 관련 증인들이 모두 불출석했다.
지난 정무위의 국무총리실 국감에서도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규명의 핵심인물인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이 ‘피고 심문’을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에게 사표를 제출토록 강요했다는 의혹 등 권력형 인사 비리 문제에 연루된 핵심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딸 특채 논란이 불거지자 사퇴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역시 국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지난 9월 22일 돌연 일본으로 출국했다. 유 전 장관과 함께 외교부 특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유종하 전 외무부장관(현 대한적십자사 총재)과 전윤철 전 감사원장도 국제적십자연맹 주최의 회의 참석과 신병 치료를 이유로 각각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재계 인사 꽁지 빠지게 줄행랑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인사들의 해외 출국을 두고도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현재 도피성 출국 의혹이 가장 짙은 인물은 라응찬 신한금용지주 회장으로 10월 22일 국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해외투자자와의 약속을 이유로 미국으로 출국 한 상태다. 라 회장은 국감이 끝난 이후 귀국할 것으로 전해졌다.
라 회장은 지난해 신한은행 정기감사에서 차명계좌와 관련된 정황이 드러났으나 금융감독원에서 묵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은 더욱 불거지고 있다.
라 회장은 현재 금감원의 중징계 통보와 검찰 조사 등으로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상태다.
이와 함께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경우 대우조선해양 협력업체인 임천공업 이수우 대표로부터 40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수사망에 올랐다. 하지만 허리디스크 재수술을 이유로 지난 달 부터 하와이에서 체류 중이다.
지난해 3월 미국 유학을 이유로 출국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아직까지 국내에 귀국하지 않고 있다. 한 전 청장이 출국한 시점은 검찰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치권 로비 의혹 수사에 나서기 하루 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 전 청장은 정관계 인사들과 골프회동, 그림로비 의혹 등이 불거지자 청장 직을 사퇴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검찰은 천 회장에게 10월 중 귀국할 것을 통보한 상태고 한 전 청장에 대해서는 “의혹만 있는 상황에서 강제 귀국시킬 방법이 없다”며 난처해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천 회장이 끝내 귀국하지 않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올 조짐이어서 검찰이 출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수사대상자에 대한 출금 조치는 수사기관의 가장 기본적이고 순차적인 조치로 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혐의사실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황증거만 존재하더라도 참고인 신분으로 출금조치는 가능하다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야당 측은 정·재계 유력인사들을 주연으로 한 검찰 각본의 ‘기획 출국설’을 제기한다.
조영택 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11일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라 회장이 금융실명법 위반, 은행법 위반, 조세범 처벌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형법상 뇌물수수죄, 상촌회 회장으로서 지난 대통령 선거 개입 의혹 등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며 “그런데도 비밀리에 전격 출국한 것은 정부의 기획 출국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한다”고 말했다.
검찰 유력인사 ‘봐주기 수사’ 상습적
유력 인사들의 도피성 외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2006년 4월 계열사의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로 당시 검찰 수사가 임박했지만 돌연 해외로 출국했다.
검찰은 현대차그룹 계열사 임원들을 무더기로 출금 조치했지만 정작 수사의 핵심인 정 회장 등 오너 일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봐주기 수사’가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안기부·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2005년 9월 정기 검진과 휴양을 이유로 돌연 출국했고 수사가 마무리된 2006년 2월에서야 귀국했다.
현대차그룹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충식 현대상선 전 사장도 2003년 7월 31일 “현대상선이 2000년 2월 스위스 연방은행에 송금한 현대 비자금 3000만 달러의 영수증을 찾아오겠다”면서 미국으로 출국한 뒤 장기간 체류하는 바람에 검찰 수사가 차질을 빚은 바 있다.
국민들은 이 같은 정·재계 인사들의 사회적 책임 회피에 대해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야 의원들은 10월 21일 국정종합감사에서 불출석 증인 전원에 대해 재출석을 요구하겠다고 밝혔고, 만약 불참했을 경우 검찰에 고소·고발 할 것이라고 강수를 뒀다. 여야 의원들이 이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보면서 모처럼 뜻을 모은 것이다.
국회법상 국감 증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을 거부할 경우 국내 거주자에게는 동행명령을, 국외 거주자에게는 재출석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회가 불출석을 이유로 유력인사를 고발한 사례는 전무하다 시피해 국회와 검찰의 추후 조치에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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