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후] 박근혜, 중도 접고 보수 택하다
[김정일 사후] 박근혜, 중도 접고 보수 택하다
  • 조기성 기자
  • 입력 2011-12-26 11:22
  • 승인 2011.12.26 11:22
  • 호수 921
  •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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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가장 큰 피해…안보에 대한 답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7일 사망함에 따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가 들썩이고 있다. 특히,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남한 정치권은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에 여념이 없다.

한미FTA 날치기 처리와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문, 이명박 대통령 측근 비리 등으로 수세에 몰렸던 여권은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 반면, 통합 후속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야권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는 김 위원장 사망이 원망스런 눈초리다.

한편으론, 5년여 만에 당 전면에 나선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과 ‘안풍’을 이어가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대권가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박근혜, 보수 결집 나서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의 사망소식이 발표된 지난 19일은, 박 위원장이 5년 6개월 만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의 전면에 재등장한 날이다.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 수 있는 김 위원장 사망에 대해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이면서 김 위원장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박 위원장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됐다. 박 위원장은 당내에서 김 위원장을 만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 위원장은 2009년 5월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해 “일시적인 회담의 틀을 뛰어넘는 보다 효과적인 틀로서, 상설적인 동북아 평화협력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틀 안에서 서로 교류협력을 강화하고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안보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면, 북핵문제와 같은 현안의 해결에 한정된 ‘소극적 평화’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적극적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해 그가 집권할 경우 이명박 정권과는 다른 대북정책을 구사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위원장은 김 위원장 조문·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의 편에 섰다.
박 위원장은 지난 20일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사건으로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그런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김정일 위원장 조문·조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의 국회 조문단 구성 제안에 대해서도 “북에서 조문단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정부도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정부 기본 방침과 다르게 가는 것은 맞지 않다”며 거부했다.

이는 박 위원장이 이명박 정부와 같은 수준의 스탠스를 취함으로써 복지부문에 있어선 중도로 전향했더라도 안보문제에 대해선 보수적이라는 입장을 확연히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김미현 서울 마케팅리서치 소장은 “그동안 박 위원장은 유연한 안보관을 가진 것처럼 보여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 거절은 보수층의 균열을 막고 재결집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며 “향후 대선가도에서 혹시라도 여성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제기될 수 있는 ‘안보 불안감’을 불식시키려는 뜻도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중도층 놓칠 수도

하지만 당장 보수층은 결집할 수 있어도 중도층에 대한 외연 확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23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김 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마련된 대북정책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의원은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중도보수가 대세가 된 한나라당이 경제정책뿐 아니라 대북정책에서도 전향적인 변화를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이번 조문정국이었으나 박 체제는 이를 놓치고 오히려 더 과거로 선회하고 있다”면서 “최소한 이명박 정부보다는 앞서 가야 하는데 그보다도 못하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당 대북정책의 강경 선회에 대한 어느 의원의 변은 ‘돌아선 집토끼를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중도보수 주장은 또 뭐란 말인지…”라며 “선거 승패는 중도세력의 향배에 달렸다는 게 정치의 상식인데, 이게 영남 패권주의에 찌든 한나라당의 한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 현상>의 5인 공저자 중 한 명인 이철희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좌우와 진보-보수를 가르는 핵심기준이 남북문제”라면서 “복지이슈를 내걸고 중도층을 아우르겠다고 한 박 위원장이 김 위원장 사망문제에 대해 보수노선을 취하고 나서면 이후 중도를 강조해봐야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원장은 “김 위원장 사망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 건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며 “김 위원장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선제적이고 전향적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박 위원장이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 2006년과는 다르다(?)

박 위원장은 17대 대선 레이스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 2006년 10월 9일 북한 핵실험 사태 이후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역전 당했고 결국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여성 정치인이 이 같은 안보이슈를 관리할 수 있겠냐’는 의구심 속에서 군 미필자인 이 후보에게 밀렸다는 점에서 ‘안보이슈’는 박 위원장에게 아킬레스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 하에서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는 점에서 한반도평화 문제는 내년 내선의 중요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박 위원장의 선택은 ‘보수본색’ 강화이다. 보수진영의 이해요구를 대변하는 행보로 자신을 둘러싼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이는 2006년 북핵 위기 때의 ‘악몽’을 재연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보수진영 입맛에 맞는 선택은 ‘집토끼’ 강화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진보나 중도 등 ‘산토끼’를 잡는 데는 역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안철수의 해법은

한편 안철수 원장은 김 위원장 사망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다.

김미현 서울 마케팅리서치 소장은 “김정일 사망으로 가장 불리한 정치인은 그동안 대권주자로 대중적 입지를 다지고 있지만 외교·안보분야와 연관성이 약한 안철수 원장”라면서 “김정일 사망은 내년 총선·대선 이슈를 ‘민생’ ‘복지’ ‘쇄신’이라는 기존 국내 변수에서 ‘안보’ ‘평화’ ‘통일’이라는 외생변수로 급속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김 소장은 “한반도 평화 방안과 위기관리 능력이 중요한 변수”라며 “이런 변수는 신인 정치인보다는 기성 정치인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이유를 들었다.

 실제 안 원장이 외교·안보에서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없다. 그나마 박 위원장은 한·미 동맹을 중시하고 현 정부보다는 대북정책에 유연성을 보일 거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박 위원장은 당 전면에 나선 만큼 앞으로 검증과정을 거치겠지만, 안 원장은 “안보에 대해선 보수적 입장”이라고 밝힌 것이 전부다.

지난 20일 아산정책연구원 여론조사에서 안 원장은 28.4%의 지지율로 박 위원장(28.1%)에 앞섰다. 하지만 북한 위기상황에 잘 대응할 수 있는 대선후보로는 13.2% 지지율을 기록, 박 위원장(29.9%)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성공한 IT 사업가’ ‘소통과 나눔’이라는 안철수식 정치가 외교·안보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난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박 위원장과의 지지율 차이를 두 자릿수까지 벌렸던 안 원장이 김 위원장 사망이라는 시험대에 선 것이다.

안 원장은 한·미 FTA를 포함해 국가적 현안에 침묵하며 논란을 피해왔다. 그러나, 김 위원장 사망 이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안철수식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9월 이후 ‘태풍’을 휘몰아치고 있는 안 원장이 차기 대선주자로 확실히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안보이슈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일 사망, 내년 선거판 흔들까

정치권은 김정일 사망 이후 급변할 ‘북한 변수’에 따른 유불리를 계산하고 있다. 여권은 안보이슈가 부각돼 보수층이 결집하기를 바라고, 야권은 남북관계 불통을 만들어놓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권심판론’으로 총·대선을 치르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20일 리서치앤리서치 조사에선 절반 가까운 국민(47.6%)이 내년 선거에 김정일 사망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나라당에 유리(23.2%), 민주통합당에 유리(19.9%)할 것이란 응답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대다수 정치전문가들도 북한 문제가 내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박사는 “김정일 사망은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사건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전제한 뒤 “김정일 사망이 내년 선거에서 주요 이슈가 되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보수세력에 유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고 박사는 이어 “현정권이 보수정권임에도 김정일 사망과 관련해 외교·안보 라인에 허점을 드러냈다”고 지적한 뒤 “(김정일 정국은) 내년 선거에서 여든 야든 준비된 비전을 제시하는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도 “보수층 결집으로 인해 총선에서 여야 간 예상됐던 격차는 다소 줄어들 것”이라면서도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이반 현상, 심판정서가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남수 한백리서치 대표는 “국민들이 학습효과를 통해 대북 변수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며 “단기적으론 대북이슈가 강화되겠지만 보수층 지지기반의 여당이 중도층을 끌어오지 못한다면 중장기적으론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김정은 후계구도로 이어지는 북한의 정치상황이 불안정할수록 국민들의 안보욕구도 높아져 보수여당에 호재가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6·2 지방선거의 천안함 폭침은 정부여당의 대북정책에 야당이 문제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그렇지 않아 여당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늘어나는 안보욕구로 보수여당이 총선에서 약진하고, 이 기세를 대선까지 이어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안철현 경성대 교수도 “김정일 사망사건은 (내년 선거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며 “북한사회가 요동치면 강경론적인 보수여당이 힘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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