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특별방송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오전 과로로 인해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에 한반도는 긴장상황에 빠져들며 연일 술렁였고, 정치권은 이에 따른 대책마련에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응방안을 논의한데 있어 여야 정치권이 확연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고 나아가 이번 사건을 이념적·정파적 사고로 접근하면서 후속작업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당장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조문 문제가 정국의 핵으로 급부상하면서 정치권이 갈등관계를 보이는 등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정치권, ‘조문정국’ 급부상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관련, 조문단 파견 문제가 정국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김정은 체제 변화 후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단초로 조문파견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자칫 조문을 둘러싸고 심각한 국론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의견이 상충하면서 정치권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은 천안함과 연평도사태에 대한 북측의 사과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에 대한 조문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이번 계기가 남북 경색국면을 화해무드로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조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민주통합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22일 고위정책회의에서 “정부가 공식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고, 한나라당이 국회 조문단 구성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 경영에 있어 미숙하고 어리석은 일이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노영민 원내수석부대표도 “조문에는 상주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애도의 조문도 있지만 외교의 조문도 있는 법”이라며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조문파동의 교훈을 통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은 “김정일이 1983년 아웅산 사태와 87년 KAL기 폭파사건 그리고 천안함·연평도 사건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국회 차원의 조문단 파견은 국민 정서와 전혀 동떨어진 얘기라 생각한다”며 민주통합당을 비판했다.
정옥임 의원도 “정부가 조문을 해야 할 대상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족적을 남겼거나,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기여했거나,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했거나, 평화를 위해 기여했던 인물”이라며 김 위원장 조문에 반대했다.
‘국회조문단’ 놓고 박근혜-원혜영 氣싸움
지난 21일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민주통합당 원혜영 공동대표가 만남을 가졌지만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국회 조문단 파견 문제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회동은 당초 새 당대표로 취임한 뒤 서로를 축하하기 위한 상견례 성격의 자리였지만, 국회 조문단 구성을 둘러싸고 양측의 입장차가 커지면서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원혜영 공동대표는 “국회 차원에서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 조문단 구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다”고 ‘국회 조문단’ 파견을 공식 제안했다. 이에 박근혜 위원장은 “남남갈등이나 국론분열이 있어선 안 된다. 정부가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했고, 이런 문제는 정부의 기본방침과 다르게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원 공동대표는 그러나 “정당을 주축으로 하는 국회는 민간과 정부의 중간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선도할 수 있지 않느냐”며 반문한 뒤 박 위원장이 지난 2002년 북한의 초정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남 점을 거론하며 “박 위원장은 신뢰를 기반으로 당당하게 대화했다. 국회가 정부보다 반걸음 정도 앞서가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근혜 위원장은 “그때는 핵문제 등 남북 경색요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치 복원을 위해 여야 협의는 필요하지만, 정부의 기본 방침에 따르는 게 중요하다”며 “국회 차원의 조문단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국론분열 양상... 李대통령 급히 진화
‘조문’을 둘러싸고 국론분열 양상이 짙어지자 이명박 대통령이 급히 진화에 나섰다.
지난 22일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황우여 원내대표, 민주통합당 원혜영 공동대표와 김진표 원내대표 등 여야 대표 및 원내대표단을 청와대에 초청, 회동을 갖고 김 의원장 사망과 관련해 정부의 대응상황 등을 설명하고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을 당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가 여러 고심 끝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입장들을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발표했다”며 “우리가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은 기본적으로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음을 보이려는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에 대한 위로 표시나 조문단의 제한적 허용, 전방의 성탄트리 점등유보 등을 통해 북한에 몇 가지 상징적 메시지를 줬다”며 “그러나 국내에는 이런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분들이 있다. 우리가 이들을 설득시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조문 문제를 갖고 흔들리게 되면 북한이 남남갈등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 뒤 “더 이상 남남갈등으로 가선 안 된다. 국론이 분열되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정치권이) 설득해 달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앞선 21일 7대 종단 대표자와 간담회를 갖고 “지금 상황에서 우리 내부가 분열돼선 안 된다. 한 목소리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조문과 관련해 “정부가 여러 가지 원칙을 정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게 국론분열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국론이 분열될 경우 국가 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YS정권의 ‘조문파동’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 국내에서는 조문파동이 일었다.
김영삼 정부는 북에 대한 정부 측 조문은 물론 재야인사들과 대학가에서 진행되는 조문단 파견 및 자체 분향소 설치 움직임에 대해 강경입장을 보이는 등 ‘김일성 조문’을 철저히 차단했고, 그 결과 북한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남북은 경색국면으로 치달았다.
이후 북한은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한반도 문제해결에 있어 남한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미국과 직접적인 현안 해결을 시도했고, 김일성 사망 석 달 후 진행된 북미 간 제네바 협상에서도 남한은 철저히 배제됐다.
17년이 지난 지금 정치권 여기저기에서 김일성 사망 당시 국내에 일었던 ‘조문파동’이 또 다시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민주통합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현 정부가 조문정국을 잘못 관리할 경우 김일성 주석 사망 때와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당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고, 통미봉남이라는 국가경영에 있어 최악의 사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영민 원내수석부대표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조문파동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입지는 약화됐고, 북한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상기한 뒤 “당시를 교훈삼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라며 조문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김일성 사망 당시 조문논란과 북한붕괴론을 앞세우다 남북 경색국면을 면치 못하고 정권 말까지 시간을 보낸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북한을 필요이상으로 자극하지 않도록 하고 조의표명 등을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이희호·현정은 방북조문 허용
지난 20일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에 대한 정부입장을 전했다.
류 장관은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 북한이 조속히 안정을 되찾아 남북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조문단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며 “다만,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유족에 대해서는 북측 조문에 대한 답례로 방북 조문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북한의 애도기간을 감안하여 12월 23일로 예정했던 전방 지역에서의 성탄트리 점등을 금년에는 유보하도록 교계에 권유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과거에 비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민간 조문을 허용하면서도 북측이 직접 조문단을 보냈던 인사의 유족에 한해서만 조문을 허용하도록 한 것을 두고 정치권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민주통합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에 대한 방북 조문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박지원 의원은 한 라디오인터뷰에서 “남북관계의 안정을 위해서는 정부가 10·4선언을 함께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망인인 권양숙 여사의 방북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이희호 여사 등 방북 조문단을 허용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렇지만 권양숙 여사도 조문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하는 것이 남북관계 안정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 “남측 조문제한은 반인륜적 행위”
북한은 외국 조문단을 받지 않겠다던 기존 입장을 선회하고 남한의 모든 조문단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의 조문방북 추진과 관련, 긍정적 회신을 보내고 “남측의 조의방문을 위한 평양 방문을 환영한다. 육로로 오면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그러나 우리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유족 외에는 어떤 조문단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한 것과 관련해 “반인륜적 야만행위”라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남한의 모든 조문단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뒤 “조의 방문은 당연한 예의 표시이고 동포애, 미풍양속, 인륜 도덕적 측면에서 응당히 해야 할 도리”라며 정부방침을 비난했다.
이어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다’는 우리 측 정부발표에 대해 “북 지도자와 주민에 대한 분리대응을 공공연히 운운하면서 공식애도와 조의표시를 부정하고 주민들을 위로한다는 식으로 불순한 속심을 드러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남조선 당국이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북남관계가 풀릴 수도 완전히 끝장날 수도 있다”며 “우리의 해당 기관에서는 조의 방문을 희망하는 남조선의 모든 조의 대표단과 조문사절을 동포애의 정으로 정중하게 받아들이고 개성육로와 항공로를 열어놓았다. 체류기간 남조선 조문객들의 모든 편의와 안전은 충분히 보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와 관련해 우리정부는 ‘기존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일축했다.
최보선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23일 정례 브리핑에서 ‘조문단을 보내는 기준이 변경될 수 있냐’는 질문에 “정부는 남북관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 국민들의 정서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정부방침을 정한 바 있다”며 “현재로서는 어떠한 변경도 가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조문단의 방북문제에 관한 정부입장은 확고하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과 정몽헌 전 현대 회장 유족 측에만 한해 방북을 허용한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