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친이-친박 하나 되자”
한나라당은 지난 15일 의원총회를 열어 ‘재창당 논란’을 수습하고 박 전 대표를 사령탑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출범시켰다.
‘박근혜 비대위’는 당 최고위원회의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아 당의 대대적인 쇄신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3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19대 총선을 진두지휘한다.
박 전 대표로선 ‘차떼기 파문’ ‘탄핵정국’으로 당이 좌초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이후 두 번째로 한나라당의 명운을 좌우할 구원투수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그 당시보다도 현재의 상황이 더욱 좋지 못하다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집권여당으로서 임기말에 치러지는 선거인데다 이명박 대통령 사저 논란과 측근비리에 디도스 공격 파문까지 상황을 추스르기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표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박 전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계파 해체’를 내놓았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의총장에서 ‘친박은 없다고 선언해 달라. 차별과 불평등은 없다고 선언해 달라’는 김성태 의원 등의 요청에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를 향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돼 열심히 함께 노력해 나가자’는 말 속에 친이, 친박 문제나 이런 저런 문제가 다 녹아있다. 자신 있게 말씀 드린다”고 직접 답하기도 했다.
친박 핵심들, 기득권 포기 선언
박 전 대표가 계파해체를 결정한 데 이어 친박계 의원들도 속속 기득권 포기를 선언했다.
친박 핵심 의원들은 ‘박근혜 체제’에서 자신들의 존재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친박계 핵심으로 꼽히는 최경환, 윤상현 의원은 이날 의총에서 친박 2선 후퇴와 계파 해체를 주장했다. 최 의원은 “친박은 모두 물러나고 나도 당직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겠다”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대권을 향하고 있는데 무슨 계파, 무슨 계파 등 이런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윤 의원도 “친박은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면서 “언론도 보도할 때 친박계니, 친이계니 이렇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앞으로 당을 이끌 박 전 대표가 계파를 초월해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유기준 의원도 16일 “이제 친이니 친박이니 하는 그런 계파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면서 “친박들도 박근혜 전 대표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이제는 옆으로 물러날 때가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당장 우리 친박계 의원들도 다음 주 모여서 이 모임(여의포럼)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친이계 쪽에서는 박 전 대표가 혹시 불이익을 주지 않을까 우려할 텐데, 계파 종식을 선언하고 또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입’ 역할을 해 온 이정현 의원도 이날 4년여 만에 전무후무했던 ‘박근혜 대변인격(格)’ 직책을 내려놓았다. 이 의원은 “박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활동하게 되는 만큼 대변인 역할을 공식 창구로 넘기고 업무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해온 이학재 의원 역시 직접 사의 표명을 하진 않았지만 조만간 ‘측근 직책’을 내려놓고 지역구 활동에 전념할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계 의원들의 2선 후퇴는 박 전 대표 등판에 앞서 뜻을 달리한 일부 쇄신파 의원들이 탈당하고, 재창당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비대위 체제로 봉합된 이후에도 몇몇 친이계, 소장파 의원들은 여전히 이견을 표출하는 상황이어서 어느 때보다 당내 화합이 중요하다는 판단의 결과로 보인다.
쇄신파인 권영진 의원 역시 지난 7일 박 전 대표와의 회동 사실을 공개하며 “당시 박 전 대표가 ‘친이, 친박은 없다’는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일부 친박, “인고의 시간 견뎠는데”
이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일부 친박계들은 지난 4년간 ‘여당 내 야당’으로 갖은 설움을 이겨낸 만큼, 비로소 잡은 이 실권을 놓고 싶지 않은 모양새다.
한 친박계 의원은 “의총에서 ‘친박계를 당직에서 배제하자’는 일부 섣부른 발언들이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당 운영을 제한한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친박 의원도 “개정될 당헌상 비대위원이 15명까지인데 이 중 측근들이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현재 박 전 대표가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측근들이 알아서 빠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이들을 완전하게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선 만큼 측근 그룹이 나서서 당 쇄신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이상돈 중앙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16일 “친박계가 더 앞장서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와야 한다”며 “(친박계가) 무조건 다 물러나면 그야말로 누구 말대로 소는 누가 키우냐”고 이 같은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이 교수는 “친박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기구는 아니지 않냐”면서 “과거 이명박 정권이 힘이 있을 때에도 정권에 대해서 쓴소리를 했던, 그런 중진 의원들은 더 앞장서서 박 전 대표를 돕고 자신들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면서 박 전 대표의 조기등판은 기정사실화처럼 여겨진 상태였다. 친박 성향의 원외 인사는 “지난 대선 경선 패배 이후 박 전 대표를 위해 지금까지 지역에서 헌신하면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결실을 보게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하기도 했다.
쇄신파와의 갈등 상황에서 한 친박계 의원이 “박 전 대표의 뜻”이라며 전달한 ▲총선 전까지 전권을 가진 비대위 유지 ▲재창당 거부 ▲당권·대권 분리 당헌 유지 등 3개항을 담은 쪽지를 건넨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최근 홍준표 전 대표의 퇴진 논란이 제기됐을 때도 일부 친박 의원들이 “박 전 대표의 뜻은 홍준표 대표 체제 유지”라고 강조한 것도 자신들의 공천을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상태다.
의구심 지우지 못하는 반박
이런 연유로 쇄신파를 비롯한 반박 진영에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 친이계 의원은 “계파라는 게 해체를 선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친박 측근이 호가호위 식으로 공천에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영남의 한 친박 중진은 출마자로부터 이력서를 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가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공천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며 “시스템 공천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고 말했다.
‘박근혜 비대위’ 구성과 운영 과정, 향후 당 쇄신 방향을 놓고 내부 진통도 예상된다. 우선 비대위에 전권을 부여하기로 한 개정안에 비판이 제기됐다. 조해진 의원은 “대표최고위원 등 지도부를 당원이 뽑는 정당에서 비대위 설치를 (당헌에) 명문화하는 것은 쿠데타를 합법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창당 명문화’를 강하게 요구한 일부 쇄신파는 아직도 못마땅한 표정이다. 정두언 의원은 “두 의원(김성식, 정태근)의 탈당으로 달라진 것은 박 전 대표의 의총 출석과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이라는 정치적 수사뿐”이라고 주장했다.
재창당을 주장했던 김용태 의원은 “이미 다 결정됐고 흐름이 그렇게 가는 걸 어떻게 하겠냐”면서 “이제 이 결정이 제대로 되길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지금 더 주장하면 당에 분란만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그것으로 국민에게 심판을 받으면 된다”면서 “이 결론을 수용할 것이고 잘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안형환, 권택기 의원도 “재창당을 뛰어넘는 수준의 쇄신을 한다고 했으니 조금 더 지켜보겠다”고 입을 모았다.
박 전 대표의 비대위 운영을 지켜본 뒤 여의치 않을 경우 반박 세력을 결집,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내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김문수-정몽준-이재오는
‘박근혜 체제’로 급격히 바뀌어가는 한나라당을 바라보는 잠룡들의 셈법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근혜 대항마’를 꿈꾸는 김문수 경기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이 그들이다.
당내 일부 의원들은 이들이 비대위에 참가해 당을 함께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해진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대권주자들이 모두 비대위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지난 16일 불교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비대위 체제 안에 정몽준·이재오 등 당 내외 실질적 지도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심재철 의원도 이날 PBC 라디오에 출연, “권력이라는 것은 쏠림 현상이 있으면 부작용이 나타난다”며 “당의 전체적인 화합을 위해서는 갖고 있는 모든 자산을 총동원해 극대화해야 할 필요는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지사와 정 전 대표, 이 의원은 비대위에 들어갈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출현으로 ‘박근혜 대세론’이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독자적으로 여권 내 독보적인 박 전 대표의 입지를 흔들지는 못했다. 반박 진영에서는 내년 총선이 박 전 대표를 흔들 수 있는 적기라는 시각도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진두지휘해 내년 총선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그때가 ‘박근혜 대항마’를 꿈꿨던 이들의 등판 시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6.2지방선거와 잇따른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 ‘박근혜 역할론’이 제기됐던 것처럼 과연 ‘김문수 역할론’ ‘정몽준 대안론’이 나올 수 있을까.
윤희웅 KSOI 조사분석실장은 “다른 대권주자들 입장에서는 한나라당이 재창당이라든가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됐다면 나설 가능성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선 만큼 함께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윤 실장은 “대통령의 임기 말 선거는 정부여당의 평가로 내년 총선 성적표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그럴 경우 박 전 대표가 지난 서울시장 보선에서 입은 데미지에 이어 당내 위상 약화 현상이 추가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 틈에 대권주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