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는 없다 제 39 화
빙의는 없다 제 39 화
  • 인터넷팀 기자
  • 입력 2011-12-15 15:45
  • 승인 2011.12.15 15:45
  • 호수 917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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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금산 : 이성계는 남해 금산에서 산신기도를 올린 후 승인을 받아 조선을 창업했다고 한다.

산신이 보살피는 한민족

절집에는 불교와는 무관한 건물이 있다. 칠성각, 산신각 등이 그것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산신, 독성, 칠성, 용왕’ 등을 모시는 민족의 전통적인 토속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토속신앙은 불교와 접합하여 절집에서 쫓겨나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쪽을 지키고 있다. 그 중에 특히 드러나는 것이 산신각이다.

한민족 산신 숭배 남달라

우리 조상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산신에 관한 숭배가 남달랐다. 우리의 고대 신화도 하느님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단군이 내려와 나라를 처음 연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이 되면 사냥과 풍요를 기원하는 국가적인 산천제를 지냈다. 고구려 평원왕이 여름 가뭄을 당하자 왕은 식사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도 영산에 단을 설치하고 나라와 왕실이 평안하기를 빌었다.

가락국 수로왕의 왕후가 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왕옥도 배를 타고 가락국에 상륙한 후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먼저 폐백을 바쳤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특히 신라는 오악숭배신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악숭배와 산신신앙이 매우 성행했다. 신라 제7대 일성니사금은 북쪽 변방을 순찰하고서 태백산에 친히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탈해왕은 토함산 신으로 신봉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산신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산신숭배는 고려에도 이어졌다. 고려 태조는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오악 명산에 가호를 빌었다. 고려 후기에는 봄·가을이면 전국의 명산에서 산천제를 지냈다.

이성계, 산을 비단으로 뒤덮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수호, 천재지변의 극복을 위해 산천제를 올렸고, 태조는 오악명산을 제사 지내는 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조선은 산신의 힘으로 개국했다고 믿었을 정도로 산신을 높이 받들었다.

조선 왕조를 창건하기 전,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산에 기도를 올렸다. 한 나라를 창업하기 위해서는 산신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 등 명산에서는 기도에 대해 응답을 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마지막으로 남해의 작은 보광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이성계는 뜻대로 되지 않자 산신에게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준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제안했다. 보광산 산신은 그 제안을 수용했다. 이성계는 훗날 조선을 개국하고 왕으로 등극했다.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산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비단으로 산을 덮는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이때 정도전이 “산 이름을 비단 금, 뫼 산 자로 해서 ‘금산’이라 부르게 함이 옳을 줄 압니다”라는 묘안을 내놓았다.

조선시대 산신숭배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동리마다 산신당이 모셔지고 있으며, 제사도 어김없이 받들어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산신 극진히 받들어

불교에서의 ‘산신’은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산신’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 고유의 토속신이었다. 불교는 재래의 산신신앙을 수용하면서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도와 사찰을 호위하는 역할의 일부를 맡는 신으로 인정했다. 화엄신중 속에 ‘산신’이 들어 있고, 사찰의 신중탱화 속에 ‘산신’ 그림이 흔하게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불교가 산신을 그렇게라도 대접해야 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산중에 자리 잡은 절들도 결국 산신의 영역에 들어 있었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산불이나 맹수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그러한 재앙을 막아 주는 힘은 산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들은 기복을 원했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산신이었다. 산신각은 일반 대중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기도처로 선호되었다.

불교가 산신각으로 인해 기복 불교로 변질되었다는 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산신은 근대 불교신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중 신앙체제로 발전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산신은 인간의 기원에 감응하여 기복에 직접 관여하기 때문에 대중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터넷팀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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