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재정위기 PIIGS 국가들 줄줄이 정권교체
- 중도층이 기성정치 심판하고 정치개혁 이끈다

세계가 경제위기 여파에 따른 정권교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태풍이 몰아치듯 정권교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특히 성난 민심이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권을 집어삼키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정권교체의 배경에는 경제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지난 8월 초 미국 및 유럽의 재정위기가 불거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이 왔다. 이로 인한 경기침체 우려로 각국의 경제가 위축되며 재정의 긴축 전망과 실업률 상승 및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그간 쌓여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정권으로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년이 지난 현재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제2의 리먼 사태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경제 위기설’이 다시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우리 국민들은 복지문제, 양극화 심화, 가계부채의 급증 등 여러 사회문제와 경제가 엉망이 된 현실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정치권에 거세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로존 위기가 전세계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 일부 국가들의 재정적자가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비교적 재정 안전국가로까지 위기가 전이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동유럽에서는 유로존 은행들이 자금을 급히 회수하면서 신용경색이 심화돼 금융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아시아의 안전판 구실을 하던 중국은 유럽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바클레이즈 캐피탈 홍콩지사는 경기 전망 보고서에서 “유로존의 성장 전망이 악화되고 중국의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자산시장 조정으로 인해 중국의 내년 GDP 성장률이 현재 컨센서스인 8.4%보다 더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각국 정치권의 확고한 결단과 타협하는 노력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프란세스코 가자렐리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로이터에서 “미국 재정적자 감축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는 선진국 경제가 민간부문의 역량을 넘어서는 개혁이 필요한 상황에서 ‘사회 계약’을 개선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지적했다.
한 국제 관료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흥분시키는 통화 및 재정정책으로 서구 사회가 2007년 버블이 터지기 직전까지 수입 이상의 생활을 즐길 수 있었으며 경제성장에 강력한 터보엔진을 달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세계는 이제 빚잔치가 끝나고 매우 느린 성장의 시대를 향하고 있다”며 “아마도 저성장 국면은 향후 15~20년간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위기 후 정치불신이 정권교체로 이어져
스페인은 지난달 20일 총선을 통해 친기업 성향인 중도 우파 국민당(PP)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러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향후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안감이 지속되고 있다.
스페인의 차기 총리가 유력한 마리아노 리호이 국민당 대표는 총선 승리 후 지지자들에게 “고난의 시기가 앞에 놓여 있다”며 “30년 만에 닥친 최악의 위기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가겠지만 기적은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최근의 경제위기를 헤쳐 나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이에 앞서 그리스는 지난달 11일 새 정부를 구성하고 경제개혁을 위한 몸부림에 돌입했다. 루카스 파파데모스 신임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과도 연립정부는 1차 구제금융 중 6차분인 80억 유로 확보를 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2차 구제금융 협약을 위해 야당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탈리아는 같은 달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사퇴하고, 후임으로 마리오 몬티 보코니대학 총장이 새 내각을 맡게 됐다. 몬티 내각은 최근 하원을 통과한 경제안정화 방안을 토대로 1조9000억 유로에 달하는 재정적자 축소와 연금 지급 연령 상향 조정, 국유재산 매각,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더욱이 북유럽의 복지국가 중 하나인 덴마크 또한 지난 9월 15일(현지시간) 경제부진에 따라 10년간 이어졌던 우파정권(우파 연정 자유보수당)이 막을 내리고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쟁취해 최근 북유럽에서 좌파가 세를 얻고 있는 흐름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박소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금 유럽의 분위기는 경제를 망친 정당은 다 내려오라는 것”이라며 “기존 정치권이 신뢰를 잃어 위기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분노의 시대, 위기가 변화를 부른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이 정권유지를 위해 각종 포퓰리즘 정책을 난발해 나라 경제를 거덜 내자, 이를 계기로 ‘정치 리더십’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경제위기를 매개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유럽발 재정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되자 외신들은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은 결국 낡은 정치였다”며 “재정위기의 밑바탕에는 나라 경제를 표와 맞바꾼 수준 낮은 ‘정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재정위기가 촉발된 지난 8월에는 영국의 유력 경제지인 이코노미스트가 후지산을 배경으로 기모노를 입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표지 모델로 등장시켰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정치 리더십’에 대해 지난 3·11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정부의 무능을 빗댄 풍자가 뒤를 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한번 잘못 자리 잡은 정치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치기 힘들며, 잘나가던 경제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워싱턴 정가는 일본 수준의 교착상태에 근접했으며, 일본·유럽과 ‘누가 더 재정 문제에 있어 신뢰하지 못할 슈퍼파워인가’에 대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금 세계 각국은 정권교체 태풍의 영향권 내에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총리들이 낡은 정치의 표적이 돼 사퇴했으며, 지난 금융위기 이후에 유로존 17개 가입국 가운데 7개국 정치 수장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때문이다.
앞으로도 대형선거가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20개국(G20)과 유로존에서만 내년에 대선을 치르는 곳이 10개국에 달한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을 치러야 하는 우리나라도 집권세력과 정치권의 리더십이 실종된 지 오래다. 여야는 경쟁적으로 복지 포퓰리즘에 빠져 있고 경제정책의 이슈는 온통 ‘복지’ 일색이다.
최근 국회에서 보여준 한·미 FTA를 둘러싼 여야 간 정쟁은 다수당의 횡포와 소수당의 물리적 저항, 당리·당략, 계파주의 등의 폐해가 얼마나 고질적이고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치 전문가들은 국민의 분노가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는 이번 기회에 기성 정치권이 위기 때마다 입만 열면 주장하는 ‘그들만의 쇄신’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기성 정치권 내부에서만 이뤄지는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 될 수 없고 구태의 반복이 될 뿐”이라며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공천 민주화와 당론에 이끌리지 않는 소신정치를 통해 국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거대한 정치개혁의 국민적 열망이 낡고 후진적인 한국 정치판을 갈아엎을지 주목된다.

우리나라 정치권에도 ‘분노의 폭풍’ 온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당시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경제성장률 수치만으로도 알 수 있다. 1997년 5.8%에 달했던 경제성장률은 이듬해에는 -5.7%로 곤두박질쳤다. 중산층이 붕괴됐으며 사회 양극화가 심화됐다.
국민들은 살기 힘들어지자 칼끝을 정치권에 정조준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초유의 정치 역사의 배경이 됐다.
올해 들어 경제위기가 현실화되고 사회 양극화 심화, 가계부채의 급증 등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20대는 취업, 30대는 육아와 교육문제, 40대는 주거 및 노후 불안정 등으로 절망과 좌절, 이로 인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는 여론의 지적이 대세다.
결국 참고 참았던 국민들은 분노를 정치권으로 폭발시켰다. 지난 10·26 서울시장 재 보궐선거에서 ‘시민후보’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당후보’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제치고 서울 시정을 장악했다. 정당정치의 위기가 초래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더욱이 내년 대선을 1년여 앞둔 현재 그간 대세론을 형성하며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유지해왔던 ‘정당후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소위 ‘국민후보’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각종 여론조사에서 밀리는 사태까지 야기되며 경제위기의 여파가 정치권으로 점화되고 있다.
각계에서는 경제위기로 야기된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번 10·26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바람을 일으켰던 2040세대와 중도층이 다시 한 번 주도적으로 나서 내년 선거에서 정치승패의 향방을 어떻게 결정할 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이진우 기자> voreolee@ilyoseoul.co.kr
이진우 기자 voreole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