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 국회 처리를 둘러싼 여야 대치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민주당이 이명박 대통령의 ‘한미FTA 발효 3개월 내 ISD 재협상’ 제안을 거부하면서 ‘실력저지’ 방침을 정했고, 한나라당은 강력 반발하며 직권상정을 통한 표결처리를 강행키로 해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렇듯 강경파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면서 막판까지 합의처리에 노력해 온 여야 협상파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면서 강행처리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한나라당의 일방·강행처리 시에는 야당의 거센 반발과 함께, 내년도 예산안 처리 진통 등 국회가 파행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또 농민단체를 비롯해 중소상공인연합회, 시민사회단체 등 그동안 한미FTA를 반대해 온 단체를 중심으로 국민적 저항 역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나라, 표결처리 분위기 조성
한나라당은 한미FTA 비준안을 조속히 처리한다는 당론에 따라 표결처리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주력하면서 야당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황우여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를 당론으로 의결한 만큼 원내대표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FTA를 비준하기 전에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한나라당을 비난하고 있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의 어제 의원총회 결과는 민주당의 요구를 묵살한 ‘동문서답’이자 강행 처리를 위한 ‘명분쌓기’”라고 말했다.
이처럼, 여야의 가파른 대치 속에 한나라당은 상임위인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표결을 시도하거나, 오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직권 상정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은 15일 외통위에서 ‘협상파’ 원내대표단 소속 김세연, 차명진 의원을 제외하고 기존 외통위원인 친이(친이명박)계 중진 안상수, 이윤성 의원을 다시 투입하는 사보임을 단행했다.
김정권 사무총장은 “더 이상 합의 처리가 힘들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다수이고, 그래도 기다리자는 것은 소수 의견”이라며 “협상파도 마지막까지 협상의 끈은 놓지 않겠지만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라고 말했다. 홍준표 대표는 이날부터 오는 22일까지 초선의원들을 차례로 만나 한미FTA 비준동의안 표결 참여를 독려할 계획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 등 야당은 비준안 단독처리를 강행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지한다는 방침이어서 여야간 물리적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여야 협상파들, 막판 협상 여지 열어둬
하지만, 여야 모두 파국을 막기 위한 마지막 협상의 여지는 여전히 열어 두고 있다.
한나라당 소속인 남경필 국회 외통위원장은 “지도부가 결단할 때까지는 야당과 계속 대화하겠다”고 했고, 김진표 원내대표도 “한나라당이 협상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아직 희망은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당 협상파 의원들은 “정부의 자발적인 문서 제출”이라는 정치적 타협안을 제시하며 여야 지도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여야 협상파 의원들로 구성된 6인 협의체도 막판 절충을 계속한다는 방침이어서 여야가 극적인 타협을 이룰지, 끝내 물리적 충돌이 이어질지 그 결과가 주목된다.
박희태 “직권상정, 국민들이 이해해줄 것”
정치권의 관심은 직권상정의 ‘키’를 쥐고 있는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쏠리고 있다. 박 의장은 여야 합의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선(先) 외통위 처리’를 주문해 왔으나 이 대통령 국회 방문 이후 직권상정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해 주목된다.
박 의장은 지난 18일 국회 의장 집무실에서 기자들을 만나 한미FTA 국회 비준과 관련, “많은 국민들이 (직권상정을) 이해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더 이상 협상카드가 없고, 중재안도 없다”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도 정치권과 의장이 노력했다고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과거의 관례를 참작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지를 (한나라당의) 정식 요구가 오면 결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또 “(FTA 상황이) 상당히 만숙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박 의장은 “여야가 합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좋지 않느냐”라는 질문에는 “카드가 없다고 손을 빼면 직무유기 아닌가”라고 직권상정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을 이어가기도 했다.
표결처리로 국회 통과할까
한나라당이 한미FTA 비준동의안 단독처리로 가닥을 잡음에 따라 이제 정가의 관심은 여당이 비준안 처리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를 확보할 수 있을지 여부에 쏠리고 있다.
국회법상 본회의에서 비준동의안을 의결하긴 위해선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 찬성이 필요하다. 재적 의원 295명 가운데 148명이 출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의석이 169석에 달하는 만큼 산술적으론 단독 처리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당 지도부의 고민은 여야 협상파의 ‘몸싸움 방지 절충안’에 서명한 한나라당 의원이 50명에 육박한다는 점에 있다. 이중에는 FTA 여야 합의 처리를 주장해온 ‘국회바로세우기모임’ 소속 22명도 포함돼 있다.
황 원내대표와 남 위원장을 포함해 한나라당 의원 22명이 참여하는 ‘국회바로세우기모임’은 지난해 12월16일 성명을 내고 “의원직을 걸고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못 지키면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만약 이들 중 22명 이상이 단독 처리에 집단 반발해 불참할 경우 본회의 개회에 필요한 의석 수를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또 야당 측의 물리적인 저지가 예상되기 때문에 자유선진당(18석)이나 미래희망연대(8석)의 표결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선진당은 지난 18일 의원총회를 열고 한미FTA 비준 동의안에 대한 반대 당론을 재확인했다.
김낙성 원내대표는 “24일 본회의에 한나라당이 한미FTA를 상정한다면 참석해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라면서 “한나라당내 협상파 상당수가 표결에 불참해 정족수가 문제될 상황이면 전략적으로 본회의 참석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단독처리를 반대하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막상 당론으로 정해 표결에 들어갈 경우 의원들 대부분이 당의 의견을 따르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