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DJ’ 한화갑 평민당 대표 인터뷰
‘리틀 DJ’ 한화갑 평민당 대표 인터뷰
  • 전성무 기자
  • 입력 2010-08-24 09:39
  • 승인 2010.08.24 09:39
  • 호수 852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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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유산 ‘햇볕정책 통한 민족 동질성 형성’

8월 18일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김대중 정권을 꽃피웠던 동교동계 인사들은 아직도 그를 추억하며 종종 현충원 묘역을 찾는다. 한국현대사의 화석과도 같은 존재인 DJ와 그를 따랐던 ‘동교동계’. 지금은 주류에서 밀려나 ‘한길(閑路)’을 걷고 있다. 하지만 DJ의 파란만장한 삶과 정치적 역경을 함께 했던 그들은 ‘김대중’이란 이름을 가슴속 깊은 곳에 새겨두고 있다. DJ를 최측근에서 40여년 동안 보좌하며 ‘리틀 DJ’라 불리는 한화갑 평화민주당 대표를 만나 DJ의 생전 모습을 들어봤다.

“항상 약자의 편에 서며 한 평생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사셨다.”

지난 8월 19일 서울 여의도 평민당 당사에서 만난 ‘리틀 DJ’ 한화갑 대표는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한 대표는 목포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외교학과 3학년 재학 중에 DJ와 첫 인연을 맺었다.

DJ의 목포상고 선배인 제갈현용(목포 홍일고 설립자, 2008년 4월 2일 별세) 선생의 권유로 동교동에서 처음 DJ를 만났다.

당시 DJ는 자신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학생이니까 목표와 소신을 가지고 정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1967년 6·8 총선 때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면서 40년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1975년 DJ의 공보비서를 맡았다가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3차례 투옥됐다. 이후 1987년 김 전 대통령 특별보좌역,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보단장을 지내는 등 DJ 최측근이며 동교동계 핵심으로 활약했다.

1992년 DJ의 권유와 지원으로 고향인 전남 신안에서 14대 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5, 16,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됐다.

그는 DJ가 남긴 최대 유산으로는 “남북교류협력을 촉진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형성하고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국내정치를 풀어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음은 한 대표와의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적 역경이 많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 서울의 봄(국내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1979년 10월 26일~1980년 5월 17일 동안을 일컫는 말) 때인 1980년도일이다. 아침에 동교동에 갔더니 김 전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게 되면 한 동지는 고향 신안에서 입후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나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왔는데. 아직 대통령 못 만들었는데 국회의원을 하라고 하시네’ 이 생각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밤새 정치적인 그런 장래를 생각하시다가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그 때만해도 나를 비롯한 동교동에 있는 사람들이 순수하게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됐을 당시 심경이 어땠나.
▲ 그때 우리가 전부 (중앙정보부에)굴비처럼 감옥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김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 받았지만 절대로 사형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까지 알려 진대로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4번이나 살려주셨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건 대통령이 돼서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주변에 대령급 들인 이학봉, 허삼수, 허화평 같은 사람들이 조급하게 사형을 집행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했다. 결국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대통령을 하게 된 것이다.

- 그때 본인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전했던 말이 있나.
▲ 그런 것 전할 겨를도 없었다. 감옥에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재판에 참석을 못했다. 비서진들은 따로 재판을 받았다. 다만, 평소 때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해라’, 그리고 ‘실력을 쌓으라’고 했다. “내가 앞으로 일할 기회가 있다하더라도 여러분들 실력이 없으면 등용을 못한다. 그 때 대비해서 공부를 하라”고 늘 이야기 했다.

- 김 전 대통령의 평소 조직이나 주변인 관리 성향은 어떠했나.
▲ 부하를 대할 때와 참모, 지도자들이 각각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온종일 집안에서 보내도 방에서 나오실 때는 반드시 넥타이와 정장차림을 했다. 그 만큼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춰줬다.

- 생전에 고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관이 무엇인가.
▲ 말할 것도 없이 인권과 민주주의다. 그리고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악의 편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스스로 독재자를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 정치인이 아닌 인간 김대중을 말한다면?
▲ 보통사람이다. 인간의 오욕칠정, 희노애락을 다 갖춘 사람이다. 손자들과 있을 때는 어린애처럼 행동하신다. 저렇게 근엄하고 철저한 분이 그런 모습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인간 본연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 참여정부 이후 동교동계 인사들이 민주당에서 배제되고 있는데.
▲ 사실이다. 그래서 평민당을 창당했다. 동교동 정신을 이어갈 정당은 민주당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 김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현재)민주당 이름을 차지한 사람들로부터 전부 공천에서 배제 당했다. 노골적으로 물갈이 한다고 떠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 현 정권의 대북정책 노선을 어떻게 보나.
▲ 현 정권은 대북정책에 대한 정책이 없다. 단순한 대결정책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남북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현재를 어떻게 보나?
▲ 잘 안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이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책인데 왜 내가 그것을 따라야 하냐는 논리다. 나는 이명박 정책을 밀고 가겠다는 거 아니냐.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의 정책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국가의 장래에 이롭냐를 따져야 한다. 근데 이 사람은 누구 것이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것이 내 것이라고 내세운 것이 없다. 그러니까 정책 부재현상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뭐라 생각하나.
▲ 남북교류협력을 촉진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형성하고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국내정치를 풀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복지, 또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뭘 해야 먹고살 것인가, 정보통신, 문화개방을 통한 한류의 발전,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 복지제도의 완성 등이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 처음으로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전성무 기자 bukethead@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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