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최태민 목사 사위 정모씨와 결별설 전모
8.8개각 이후 박근혜 전 대표는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를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끊이질 않으면서 친박 진영을 황당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친박 인사들이 하나 둘씩 탈박하거나 변심하면서 친박 진영에선 ‘박근혜 죽이기’라며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 최태민 목사의 사위 정윤회씨와 박 전 대표가 결별했다는 말이 돌았다. 이와 관련 친박 진영에선 ‘언제 때 얘기냐?’는 반응과 ‘어느 정도 맞다’고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 불거졌던 뜨거운 감자였던 ‘최태민-정윤회 사건’이 왜 현 시점에 나오는지 알아봤다.박근혜 전 대표와 정윤회 전 대표 비서실장을 둘러싸고 근거 없는 소문이 재차 돌고 있다. 그것도 반박 진영이 아닌 친박 진영에서 나왔다. 지난 2007년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최근 본지와 만난 자리에서 “박 전 대표가 최근 정윤회 전 대표 비서실장과 결별을 결심했다”는 말을 던졌다. 정씨는 지난 경선 때 이명박 캠프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던 고 최태민 목사의 사위다. 정씨는 최 목사의 다섯 번째 부인의 딸인 최순실씨의 남편으로 박 전 대표와 인연은 98년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윤회 결별설에 친박측, “맞다”vs“04년부터 소원”
박 전 대표는 2007년 한나라당 후보 검증위에서 이와 관련해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며 “그런데다 한나라당은 처음 야당이 돼 상당히 위축되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곳에서 누가 선뜻 도울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선거는 치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대표 때 그만뒀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의 발언에 따르면 정씨는 박 전 대표가 2004년 당 대표가 되면서 공식적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셈이다. 하지만 2007년 이명박 캠프진영에선 최 목사와 정씨를 아킬레스건으로 잡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최고조는 2007년 6월17일 한나라당 당원이자 이회장 전 총재를 대선 때 지원한 ‘부국팀’ 자문위원이었던 김해호씨의 폭로였다. 김씨는 후보 검증위가 개최되기 전 기자회견을 통해 박근혜 전 대표, 최태민 목사, 그리고 사위 정씨에 대해 각종 의혹을 제기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70년대 후반 박 전 대표와 구국봉사단 활동을 같이 했던 고 최태민 목사와 관계를 거론하며 “박 후보가 ‘최태민은 깨끗한 사람이다’, ‘천벌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최목사는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1건 등 수사기관에서 확인된 비리만 43건”이라며 “박근혜 후보와 끈을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 자산이 없었던 사람인데 후손들은 엄청난 부동산과 재산을 향유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씨는 최태민 목사 사위 정씨관련 “1996년 최 목사의 비서이며 2002년까지 박근혜 비서실장으로 현재 강남팀을 운영하는 정윤회씨는 최순실씨의 남편”이라며 “정씨는 박근혜 후보가 평양에 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도 비서실장으로 동행했는데 최태민 일가가 이런 자리까지 동행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육영재단관련 “최태민의 로얄패밀리는 육영재단을 재산증식의 장으로 이용했고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도 행사치 못하고 최태민과 그의 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며 “작은 재단 하나도 잘 꾸리지 못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박측, “정씨 측근? 경선때 고발했어야 했는데…
박 전 대표는 후보 검증위에서 “당시 최태민은 기념사업회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일로 육영재단을 출입한 적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만나 육영재단 및 기념사업회 일과 관련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며 “그런데 이에 대해 오해가 있어 최태민 물러가라고 데모를 했다. 순전히 오해다. 최태민씨나 최순실씨가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박근혜 후보측에 고발된 김씨는 검찰에 허위사실 공표혐의로 구속됐고 배후로 이명박 캠프에서 일하던 임모씨가 공모 의혹으로 체포당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경선이 끝난 지 3년이 넘어가는 지금 재차 박 전 대표와 정씨와 결별설이 나오는 것에 대해 친박측의 반응은 의아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박 전 대표의 보좌진중 일부가 정씨가 대구 달성군 선거 당시 추천한 인물이라고 여전히 정씨의 ‘인의 장막’에 박 전 대표가 갇혀 있다는 말까지 더해졌다.
이에 대해 박근혜 경선 캠프에 근무했던 인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외부에서 특보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정윤회와 박 전 대표와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라며 “지난 경선때부터 둘 사이가 소원해진 상황”이라고 동의했다. 하지만 정씨가 추천한 인사가 여전히 박 전 대표와 함께한다는 지적에 대해선 “박 전 대표가 허수아비도 아니고...”라며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씨가 추천한 인사로 지목된 박 전 대표실의 한 보좌진 역시 본지와 통화에서 “경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서 ‘정씨와 친인척이다’라는 논평을 내서 고소를 할려고 했다”며 “그러나 당내 경선이고 박 전 대표가 ‘참아라’라고 말해 유야무야 넘어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와 또 다른 보좌진이 언급됐는데 정씨와 함께 98년부터 일한 것은 맞지만 추천을 받거나 친인척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오히려 이명박 캠프 진영에서 사적으로 ‘사과’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정씨관련해서도 그는 “최근에 결별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2004년 박 전 대표가 당 대표로 되면서 공조직이 있은 후 발길을 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재원, “육영재단 경영권 둘러싼 음해성”
한편 박근혜 캠프에서 대변인 역할을 했던 김재원 정치평론가 역시 같은 입장을 보였다. 김 평론가는 “결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도 안된다. 박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사적인 관계로 무보수로 자문을 했다”며 “하지만 당 대표가 된 2004년초반부터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김 평론가는 ‘박 전 대표를 흠집내려는 세력들이 고의로 흘리는 것 아니냐’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현재 육영재단이 박근령-신동욱 부부와 박지만씨가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여전히 승무회라는 조직의 사람들이 박근령씨와 함께 하면서 장난을 치는 것 같다”며 “승모회 출신 인사들은 이미 다 육영재단에서 쫓겨났는데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고 전했다.
또한 김 평론가는 “박 전 대표가 90년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사이 경영에 무관심한박근령씨가 이사장이되면서 그녀를 대신해 승모회 회원들이 운영해 전횡을 일삼았다”며 “아직도 장부상 200억원이 비고 예식장비를 대여하면서 차익을 남겨먹고 부지를 성남으로 이전해 아파트를 져 1조원 차익을 내겠다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고 반발했다.
승무회는 90년 10월즈음에 박 전 대표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최태민씨의 육영재단 전횡’을 빌미로 ‘전횡을 일삼는 박근혜-최태민 물러나고 근령씨를 이사장으로 추대하라’는 시위를 벌인 조직이다. 김 평론가는 한 마디로 ‘잇권 단체’로 현재는 박근령씨의 남편인 신 교수가 배후에 있다고 보고 있었다. 결국 육영 재단 경영권 다툼으로 인해 박 전 대표가 불똥을 맞고 있다는 시각이다.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pot.co.kr
#최태민 목사는 누구길래…
최도원?최상훈?최태민 이름 개명
최태민 목사는 1912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출생했다. 해방 직후 월남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최도원이었다. 해방 이후 최상훈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다시 1977년 최태민으로 바꾸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그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경찰공무원(1946년)으로 활동했고, 육군 헌병대 문관으로도 근무했다(1949년). 또 사업을 벌여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과 대한행정 신문사 부사장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는가 하면(1954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도 취임했다. 그 뒤 교단을 운영하며(1973년),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 ‘영생교 본부’를 만들어 신도를 모았다. 이어 목사 안수를 받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동총회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1975년 영생교 교주 역할을 그만두고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시켰다. 이후 이 단체는 ‘대한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역시 최 목사가 만든 ‘구국여성 봉사단’과 통합해 ‘새마음 봉사단’이 됐다. 1978년 이 단체의 총재는 박근혜 후보였다. 최 목사가 어떻게 박 후보와 가깝게 됐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래저래 그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 박 후보를 움직였고 그만큼 위세를 떨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비위 관련 소문으로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도 박 후보는 최 목사를 옹호했다. 최 목사는 5명의 부인 사이에서 3남 6녀를 두었다. 그의 다섯 번째 딸 최순실씨의 남편 정윤회는 박 후보의 입법보조원을 지냈다.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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