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재오, 박근혜와 ‘밀월구축’ 노럭

‘왕의 남자’ 이재오가 돌아왔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나홀로’ 선거운동을 했고 당에 복귀해도 ‘조용하게 지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시끄러웠다. 당장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선거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한나라당내 친이 친박 인사들 역시 이재오 당선자의 모습에 반신반의했다. 무엇보다 세간의 관심은 박근혜 전 대표의 반응에 쏠렸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답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할 만하지만 없었다.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나온다. 실제로 친박 진영에선 이 당선자의 현재의 모습보단 과거의 모습에 연연하는 모습이다. 과거 이 당선자가 박 전 대표 앞에서 고개를 숙인 적이 있었지만 결국엔 정면 도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서로 너무 다른 인생을 살아온 박근혜-이재오 두 인사의 과거사를 되짚어봤다.
박근혜 전 대표(59)와 이재오 당선자(66). 남녀라는 차이만큼 서로 다른 이력을 가진 두 인사다. 두 사람의 대립각은 태생부터 이력, 정계입문 과정까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대통령의 딸’인 박 전 대표는 쿠데타로 집권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기반인 대구·경북을 텃밭으로 삼고 있는 박 전 대표는 지난 2004년 총선에서 탄핵열풍에도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건져내 일약 대권 후보로 도약했다. 이후 나서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머쥐며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반면 이 당선자는 중·고교에서 10년간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과 민중당 사무총장 등 재야활동을 거쳐 정계에 진출했다. 이 의원은 재야활동으로 1973년 유신시절에만 세 차례 투옥됐다.
박근혜-이재오 살아온 인생 ‘천지차’
두 인사의 이런 갈등은 지난 2006년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터져 나왔다. 이 당선자가 박 전 대표를 향해 ‘독재자의 딸’이라고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은 한 스포츠지와 인터뷰에서 “유신독재의 딸인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간판 얼굴로 부각되는 것에 반대한다”며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가 되면 개인은 영광이겠지만 한나라당과 야당은 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박 전 대표가 무슨 정치적으로 대단한 업적이 있어 당 대표가 됐느냐”며 “박 의원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고 있지만 2007년에 출마하면 100전 200패”라고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박 전대표가 당 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이 당선자와 소장파는 같은 해 8월 전남 구례로 떠난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박 전 대표에 재차 반기를 들었다. 이 당선자는 “한나라당이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내세워 군사쿠데타나 유신독재의 반민주·반인권성을 덮으려 해서는 안되며 사과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박 전 대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에 죄가 많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면 왜 지난 총선 때 도와달라고 했느냐.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3공 5공이 당의 뿌리인지 모르고 들어왔느냐.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대표를 흔들려면 아예 나가라”고 탈당하라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이후에도 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 ‘세종시법’으로 박 전 대표와 다른 의견을 피력하면서 2004년 내내 박 전 대표와 이 당선자는 칼끝 대치를 벌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다소 풀릴 기색은 2006년 1월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때였다.
당시 이명박 대리인으로 나선 이재오 당선자와 박근혜 대리인으로 맞선 김무성 원내대표가 맞붙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당선자는 당 소속의원 123명중 72표를 얻어 친박 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 당선자는 당 대표였던 박 전 대표의 ‘심중’을 거스리지 않겠다는 점을 공공연히 부각시켰다. 또한 당선 이후에도 이 당선자는 “대표와 원내대표가 사랑하고 협조하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정권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며 “박 대표를 모시고 대선에서 승리하도록 기반을 닦겠다”고 다짐했다.
나아가 이 당선자는 “나는 한나라당의 ‘트로이의 목마’도 아니고 ‘위장취업’하러 온 사람도 아니다”며 “(내가 원내대표가 되면) 박 대표와 갈등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는 데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박 대표와 상의하겠다”고 몸을 바짝 낮췄다. 하지만 이런 관계도 이 당선인이 그해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면서 5개월만에 ‘박근혜-이재오 허니문’은 끝이 났다.
6년 동안 단 5개월간 허니문, 2010년은…
이 전 의원은 친박 강재섭 대표에 맞서 이명박 전 시장 지지로 친이 친박간 대리전 양상을 띄었기 때문이다.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 까진 이 당선자는 “내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대선 후보들을 여당의 무차별적 공격으로부터 지키겠다”고 박 전 대표와 친밀감을 강조했다.
그러나 7·11 전당대회 결과 박 전 대표가 지지한 강재섭 후보가 당 대표로 당선되자 이 당선자는 최고회의에 불참하고 산사에 칩거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났다. 당시 이 당선자는 ‘박근혜-이명박’ 대리전 논란관련 언론을 통해서 “다 박근혜쪽에서 공작한 것”이라며 “대리전 냄새를 풍겨서 박심을 자극하고 박 전 대표도 노골적으로 가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내가 전당대회장에서 연설할 때 박 대표가 자리를 뜬 것은 사실상 연설방해 행위로밖에 안 보인다”며 “내가 원내대표 할 때 그렇게 잘 모셨는데 한 마디로 배신행위 아니냐”고 불만을 표출했다.
급기야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과 본선때 이 당선자는 이명박 캠프의 좌장으로서 박 전 대표에 맞섰다. 특히 경선이 한창 뜨거울 당시 이 당선자는 박 전 대표를 겨냥해 “국민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한 게 없지 않냐”고 재차 직격탄을 날렸다. 또한 그 이듬해인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 당선자는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과 함께 ‘친박 공천 대학살’을 한 배후로 지목됐다. 이로인해 박 전 대표는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울분을 토로했고 친박 진영에선 이방호, 정종복 전 의원과 함께 이 당선자를 ‘공천삼적’(公薦三賊)으로 낙인찍었다.
친박, 몸 낮춘 이재오에 “두고보자” 냉소적
이런 이 당선자가 지난 7·28재보선에서 생환해 당에 복귀한 것이다. 2008년 4월 여의도를 떠난지 2년 3개월만의 국회 입성인 셈이다. 이 당선자는 이번에도 자신이 과거 이력으로 인해 박 전 대표와 갈등이 당 분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감을 불식시키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이 당선자는 재보선 출마 결심을 하기전인 지난 5월10일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다. 또한 출마 이후에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가 원내대표를 하고 박 전 대표가 당 대표를 할 때 호흡이 잘 맞았다”며 “국회 복귀하면 친박계에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물러설 것은 물러서면서 좀 더 잘 할 것”이라고 낮은 자세를 보였다. 이 당선자는 당선ehls 이후에도 “나로 인한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친박이 의심어린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경이 바로 과거 이 당선자가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 재차 박 전 대표와 ‘전면전’을 해왔던 전력 때문이다. 친박 한 당선자는 “과거 몸을 낮췄던 사례가 있었지만 그때 뿐 재차 정면도전을 해왔다”며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pot.co.kr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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