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탁구 위기인가 새로운 계기인가

한국 탁구대표팀에서 활약할 귀화선수들의 인원수를 제한하는 신설 규정안이 검토될 예정이다.
오는 5월에 개최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선수 선발 경쟁을 펼치기 위해 지난 10일 태릉선수촌에 남녀 탁구 선수 16명이 소집됐다. 여자 8명 중 3명이 귀화선수였다. 귀화선수들이 대표팀 상비 1군 명단에 잇달아 이름이 오르자 국내 선수들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한탁구협회는 연내에 대표팀 내 귀화선수 인원을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한다고 밝혔다. 중국출신 귀화선수들이 한국 탁구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본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귀화 탁구선수들의 입지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3일에 열린 제 64회 전국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남녀 단식 우승이 모두 귀화선수인 정상은(21·삼성생명)과 석하정(25·대한항공)에게 돌아간 것이다. 1947년부터 시작된 종합선수권 사상 처음이다. 종합선수권은 중·고교생은 물론, 대학, 실업팀 선수들까지 총출동하는 탁구계의 최고 권위 대회이다.
정상은은 한국탁구 간판스타 유승민(29·삼성생명)과 오상은(34·인삼공사)을 각 8강과 준결승에서 꺽었다. 결승에서는 기대주 김민석(19·인삼공사)을 차례로 제압하고 정상에 등극했다. 귀화선수들을 견제하는 시각이 높아지며 한편 한국 탁구의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2000년대부터 대거 귀화
가장 먼저 한국에 귀화한 선수는 주배준과 곽방방(30·강원도립대)이다.
1998년 중국 청소년 대표로 활약했던 주배준은 2003년 5월 포스데이타(해체)에 입단하면서 국내 무대에 데뷔했고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7년에는 회장기에서 단식·단체전 우승으로 대회 2관왕에 올랐다.
홍콩 국가대표 출신의 곽방방은 김승환(31)과 결혼해 안재형-자오즈민에 이은 ‘제2의 한·중 핑퐁 커플'로 화제를 모았다. 2003년 4월 혼인신고를 한 그는 2005년 5월 결혼했고 국적법 2년 경과 규정에 따라 7개월 후인 같은해 12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을 따내 성공시대를 열었다.
주배준과 곽방방의 뒤를 이은 선수가 대한항공 ‘듀오’ 당예서(30)와 석하정(26)이다. 자오즈밍의 권유로 2007년 귀화한 당예서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대표팀 에이스로 맹활약해 단체전 동메달 사냥에 앞장섰다. 같은 해에 귀화했지만 당예서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석하정은 베이징올림픽 출전 좌절의 아픔을 딛고 상비군에 발탁됐다. 2009년 탁구 대표 상비군 최종선발전에서 여자부 전체 3위(17승4패)로 태극마크 꿈을 이루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당예서와 석하정은 팀의 훈련 파트너로 시작했다가 국가대표로 ‘코리안드림’을 성공한 케이스다.
어린 조선족계 선수들의 반란
남자탁구의 정상은과 여자 유망주 강미순(18·대우증권)은 국적은 중국이지만 재중동포(조선족) 출신이다.
정상은은 중국에서 탁구를 시작해 고교 때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 2006년부터 동인천고등학교에서 활약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비상했다. 2009년부터 삼성생명에 입단해 유승민, 주세혁 등 베테랑 선수들에게 밀려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지만 이번 선수권대회에서 그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는 서현덕 이상수(이상 삼성생명), 김민석, 정영식(대우증권)과 함께 한국탁구 ‘빅5’로 부상했다. 준우승을 한 김민석은 “정상은은 아직 파워가 있는 중국 스타일 탁구를 해 어려웠다”고 밝혔을 만큼 기량이 뛰어나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출생한 강미순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왼손 셰이크핸드 드라이브 전형이다. 포어핸드 드라이브도 위력적이고 스피드와 파워 모두 뛰어나다. 중국에서 배운 기본기가 탄탄한 게 장점이다. 2008년 한국 국적을 얻었다. 2009년 탁구 국가대표 상비군 선발전 여자부에서 최종 5위(12승6패)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적을 취득했지만 ‘19세 이하는 고등부에 등록해야 한다’는 대한체육회 선수 등록 규정 탓에 2009년에는 실업대회인 슈퍼리그 출전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나이가 실업 진출을 막을 수 없다는 체육회의 선수자격심의위원회 결정에 따라 족쇄가 풀렸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쟁쟁한 언니들과의 경쟁을 통해 대우증권의 에이스로 떠올랐다.지난해 그는 ‘코리아오픈 21세 이하 여자단식대회 결승전’에서 미사코 와카미야(일본)를 4-0으로 손쉽게 제압하고 생에 첫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한국 탁구는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들의 돌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젊은 귀화선수가 독식하는 여자팀
여자탁구는 귀화선수가 장악하고 있다. 2006년 곽방방, 2007~ 2008년 당예서, 2009~2010년 석하정까지 5년간 종합선수권 패권은 중국 귀화선수가 독차지했다. 강미순과 지난 달 귀화한 김연령(23·삼성증권)도 내년 대회에 월등한 활약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귀화선수의 독식이다. 이들 귀화 선수는 중국에서 엘리트급도 아니었다. 그런 이들과의 경쟁에서 국내 여선수들이 밀려나고 있다. 베테랑 김경아(35·대한항공), 박미영(30·삼성생명) 등 30대 외에 이들에 대적할 국내 선수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아픈 현실이다.
현정화 여자대표팀 감독은 “실업팀들이 중국 유망주들을 계속 영입하고 있다”며 “경쟁력을 갖춘 귀화선수들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히면서 “조만간 귀화선수들 만으로 대표팀이 구성될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올림픽의 경우 출전할 수 있는 대표선수는 남녀 각 3명씩으로 엔트리가 많지 않은 만큼, 현 감독의 우려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현 감독은 “국내 선수들의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대표선수 선발 시 귀화선수 인원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이미 대표팀 내 귀화선수를 1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협회, 귀화선수 규정 검토해야
중국국적 선수들이 국내로 귀화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중국 국가대표팀에 소속돼 있어도 선수층이 워낙 두터워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는 한정돼 있다. 불만을 품는 선수들이 해외 국가로 귀화를 각국의 대표팀 선수로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다른 국가의 유니폼을 입고 중국 동포 선수들과 게임을 치러야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종종 보인다.
국제탁구연맹(ITTF)도 귀화 선수들이 국제대회 메달을 휩쓸자 베이징올림픽 이후 귀화선수의 세계선수권 및 월드컵 출전 자격에 제한을 뒀다. 21세 이상 성인이 돼서 귀화한 선수에게는 대회 출전을 금지시켰다. 귀화한 18~21세 사이의 선수는 7년간 대회 참가 금지, 15~18세 이하의 선수는 5년, 15세 이하는 3년간 대회 출전을 금하고 있다.
이 규정은 ITTF가 주관하는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 대회에만 적용된다. 다른 기관이 주관하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강미순을 지도하고 있는 김택수 총감독(대우증권)은 “중국 선수를 키우고 귀화시키는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귀화선수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국내 선수들의 국제경쟁력을 위해 대표팀 내 귀화선수 인원을 제한하는 것은 협회 차원에서 검토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외 대회를 장악하는 귀화선수들의 활약은 육성 프로그램에서 양성돼야 할 국내선수 자원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다. 중국 탁구의 2류 선수들이 국가대표선수로 자리 잡으면 국제무대에서의 한국 경쟁력은 전보다 떨어질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한 탁구인은 “국내 선수의 육성을 위한다면 귀화선수의 대표 선수 쿼터를 1, 2장으로 제한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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