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 한국 농구 미래 짊어지겠다

2010~2011 농구시즌이 한창이다.
농구 코트 위는 환상적인 곡선을 그리며 바스켓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3점 슛과 용병선수들의 화려한 슬램덩크 같은 멋진 개인기들이 펼쳐져 농구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10년을 넘게 코트 위를 누비던 문경은(40)과 우지원(38), 이 두 명의 선수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은 더 발전될 한국 농구계를 바라며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자신들의 자리를 후배들에게 내주었다.
그들의 과거를 뒤돌아보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알아본다.
2009~2010 농구시즌이 끝난 지난해 5월. SK의 ‘람보슈터’ 문경은과 ‘코트위의 황태자’ 우지원(모비스) 등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큰 인기를 모았던 ‘오빠’들이 코트 위를 떠났다.
문경은은 현재 SK 2군 농구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쌓고 있다. 우지원은 S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유소년 농구교실을 운영해 농구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은퇴를 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이다.
문경은, 선수 키우는 재주 탁월
아직 코치보다는 선수 명함이 더 어울리는 문경은은 현재 지도자로서 첫 시즌을 보내고 있다. 아직 배우는 단계의 초년병 지도자이지만 선수를 키우는 재주가 남다르다.
문경은 코치의 지도아래 무명에 가까웠던 신상호(25), 이민재(24)가 깜짝 활약으로 스타가 많은 것으로 이름 난 SK에서 확실히 자리매김 중이다. 문 코치는 이들의 장점과 잠재력을 단 한 번에 꿰차 1군에서 뛸 수 있는 쓸 만한 선수로 변신시켰다.
SK와 라이벌 삼성의 경기가 열린 지난해 12월 19일, 문 코치가 가르치는 이민재가 승부처마다 3점 슛을 터트렸다. 이 선수가 올린 11득점(3점 슛 3개 포함)은 SK가 1승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이민재는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 2라운 6번으로 전체 16순위에 지명된 선수이다. 슛은 좋기로 유명한 선수이긴 했지만 프로 구단들의 구미가 당기는 정도는 아니었다. 신상호는 현재 연습생 신분이다.
문 코치의 지도아래 SK 2군 선수들은 슛 연습 때 던지는 개수를 세지 않는다. 성공한 슛만 센다. 슛 하나하나에도 집중력을 더 하라는 게 문 코치의 방식이다. 연습에 성과가 있는 듯하다. 문 코치는 “오픈찬스에서 신상호와 이민재의 슛 정확률은 김효범, 변기훈보다도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두 선수 다 자신감만 더 생기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 코치는 자신이 선수 시절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감독들에게 배우며 익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시절 은사인 최희암 전 감독(56)에게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문 코치가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점이다. 중·고·대·삼성 직속 선배인 고 김현준 코치는 원드리블 슛, 백보드를 활용한 슛 등 자신의 노하우를 문 코치에게 모두 전했다. 자신감을 심어준 것 역시 김현준이다. 선배들과 뛰면서 배짱을 키웠다. 그 시절에 배웠던 ‘자신을 믿는 법’과 ‘배짱’을 후배들에게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문경은에게서 제법 지도자의 냄새가 나는 이유이다.
우지원, 지도자의 길 잠시 접어
우지원은 유소년 농구 활성화를 위한 길을 택했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은퇴할 당시 현역시절에 뛰었던 모비스의 전력분석원 자리를 잠시 겸했지만 포기했다. 전력분석원은 초보 지도자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보장된 직위를 포기했다는 것은 지도자의 꿈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이에 우지원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내 꿈이다. 단지 그 꿈을 잠시 뒤로 미룬 것뿐이다. 나의 또 다른 꿈인 유소년농구 활성화를 위한 길을 먼저 택한 것 뿐이다”며 “전력분석과 유소년농구를 겸하려고 했지만 2개월 정도 일을 하다 보니 어느 하나 제대로 100%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유소년농구에 먼저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고 말했다.
우지원은 어린이 농구꿈나무들을 키우기 위한 유소년농구교실을 지난해 9월 오픈했다. 유소년농구에 대한 계획은 이미 몇 년 전 선수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는 “학교마다 선수가 될 만한 학생이 없어 고민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한국농구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기반이 튼튼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농구교실을 열게 된 계기를 말했다.
우지원은 농구교실이 정착을 하게 되면 학업을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다. 그는 이미 선수생활을 하면서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소년농구 준비를 하느라 은퇴 전보다 더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래도 울산(모비스의 연고지)에서 지냈던 선수시절보다 가족과의 시간이 많아져 행복하다. 아내와 두 딸도 매일같이 아빠를 볼 수 있어 즐겁다. 그는 “가정에 충실한 아빠와 남편 노릇을 이제야 제대로 하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베테랑 말솜씨로 SBS 농구 해설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버라이어티쇼에도 아내와 출연해 화제가 됐다.
‘오빠부대’ 이끌며 최고 인기 누려
농구대잔치는 한국 남자농구 프로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대회로 자리 잡았다. 이 대회 출범 첫해인 1983년에는 161경기를 치르는 동안 20만300여 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최고의 절정을 이룬 1994∼1995 시즌에는 206경기를 치르는 동안 40여 만 명이 입장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농구 증흥기’라고 불리는 90년대는 미국 NBA 시카고불스의 마이클 조던이 화려한 드리블로 현역생활을 이어갔다. 소년챔프에 일본 농구 만화 ‘슬램덩크’가 연재되고, TV에서는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이렇게 농구가 흥행과 인기몰이를 했던 시절, 문경은과 우지원은 이상민, 사장훈 등과 함께 농구대잔치 세대 인기스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연세대를 대학팀 사상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었다.
둘은 대학시절부터 ‘오빠부대의 우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둘 다 수려한 외모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3점 슈터로 농구실력을 갖췄다보니 수많은 여성 팬들을 거느려 농구계에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람보슈터’문경은과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이라는 별명도 당시 생겨난 것이었다.
광신정산고 시절부터 슈터로 이름을 날린 문경은은 상무 제대 후 프로 원년인 1997 시즌 삼성전자에 입단해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2000~2001 시즌 삼성의 프로 첫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지난해 SK에서 은퇴하기까지 13시즌 동안 신세기, 전자랜드를 거쳤다. 통산 610경기에 출전해 9347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3점슛은 1669개를 기록해 프로통산 최다 3점슛 성공 기록이다.
경복고-연세대를 거친 우지원도 1997년 대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모비스로 적을 옮겨 유재학 감독 밑에서 팀의 4차례 정규리그 우승과 2번의 통합우승에 기여했다.
군복무 시기인 1998~1999 시즌을 제외하고 통산 13시즌 동안 573경기에 출전해 경기당 평균 12.8점, 2.5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의 1116개의 3점슛은 문경은에 이어 이 부문 역대 2위의 기록을 작성했다.
문경은과 우지원은 은퇴 시기도 비슷할뿐더러 등번호가 10번이었던 점도 똑같다. 이들의 배번은 각자의 마지막 소속팀인 SK와 모비스에서 영구 결번됐다.
최근 일부 농구팬들 사이에서 “농구의 전성기는 프로리그 시작과 동시에 농구대잔치의 최후와 함께 끝났다”며 농구를 외면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만큼 현재 프로 농구는 인기회복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앞으로 문경은과 우지원의 지도 아래 한국 농구가 다시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