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월계수회’ 사조직 운영의 ‘롤모델’

총리실 민간인 사찰로 불거진 ‘영포회’ 파문으로 역대 사조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사조직 출신들은 여지없이 청와대를 비롯해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해 정권 탄생공신으로서 ‘성골’ 지위를 톡톡히 누렸기 때문이다. MB 정권에서 영포회가 성골이라면 진골은 단연 TK출신 선진국민연대, 그리고 6두품은 일반 선진국민연대라는 냉소적인 반응마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역대 사조직이 그러했듯이 주역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의 ‘월계수회’, YS 정권의 ‘동숭동팀’, DJ 정권의 ‘연청’을 이끌었던 인사들이 철창 신세를 면치 못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MB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인 선진국민연대가 노태우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월계수회’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역대 정권의 사조직에 대해 알아봤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등 공신을 한 사조직이 바로 월계수회다. 대통령의 처 조카이자 안기부장 특보였던 박철언 전 장관이 1987년 6·29선언 다음날인 30일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월계관을 쓰자’는 의미로 조직했다. 내부에는 정치인을 양성하기위해 ‘노태우 스쿨’까지 가동해 정관계 요직에 진출시켜 회원들을 포진시켰다.
회원수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200만명에 이르렀고 87년 대선에서 2위 후보와 180만표 차이로 회원수와 비슷해 승리한 노 대통령은 월계수회를 1등 공신으로 인정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청와대 만찬에 월계수회 핵심 인사들을 초청해 “내가 대통령이 되는 데 여러분이 큰 공신이다”며 치하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월계수회 멤버들은 정관계 요직에 활발한 진출을 할 수 있었다. 그 선봉에 섰던 인사가 박 전 장관이다. 그는 청와대 비서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을 거치면서 ‘6공 황태자’로 불렸다. 정치인 출신도 초반 11명에서 60명까지 늘어나 당내 최대 계파로 떠올랐다.
노태우-이명박, “사조직 때문에 대선 승리” 격려
하지만 월계수회가 지나친 정부조직내 인사개입으로 권력 사유화 비판을 받았다. 종국에는 월계수회 전횡을 고발하는 괴문서가 나타나면서 견제하려는 세력에 의해 권력투쟁으로 비화됐다. 결국 이런 권력투쟁의 결과 박 전 장관은 YS 정권이 들어서면서 슬롯머신 사건으로 인해 1년 넘게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와 관련 박 전 장관의 한 측근은 “지금 영포회 파문을 보면 박영준 차장이 선진국민연대를 만들면서 월계수회를 ‘롤모델’로 삼은 것 같다”며 “이 대통령 역시 2007년 취임 이후 선진국민연대 회원들을 서울시내 호텔로 초대한 자리에서 박영준, 김대식 등에 무등을 타고 나타나 ‘여러분으로 인해 내가 당선됐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선진국민연대 회원이 460만명이었는데 경쟁자인 정동영 후보에게 공교롭게도 480만표 차이로 승리했다.
또한 그는 “당시 월계수회에선 차기 대권 후보로 ‘YS는 안된다’고 각을 세웠는데 선진국민연대 출신들 역시 ‘박근혜는 안된다’는 입장으로 알고 있다”며 “월계수회의 전철을 너무 닮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YS 정권에서는 사조직으로 민주산악회(이하, 민산)와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가 대표적이다. 민주산악회의 경우 최측근 최형우, 서석재 의원 등이 주도한 것으로 81년 6월 결성됐다. 그런 점에서 대선을 위한 조직보다는 민주계 사조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선 직후에는 회원이 150만명에 이르렀다. 민산 역시 조직확장 과정에 공조직과 마찰이 심했고 이권단체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나사본은 92년 대선 직전인 7월 YS 차남 김현철씨가 만든 사조직으로 언론대책팀, 선거전략팀, 조직관리팀 등 대선 외곽조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민산이나 나사본 모두 YS가 당선 직후 바로 ‘모든 사조직을 해체하겠다’고 밝혀 권력의 단맛을 깊게 보지는 못했다. 반면 영포회같은 사조직과 유사하다면 오히려 92년 대선 당시 YS 선거기획을 맡은 동숭동팀으로 볼 수 있다. 선거 전문가 전병민씨가 주도했지만 나중에 현철씨가 동참하면서 YS 정권의 청사진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하나회 해체 등이 있다.
당연히 현철씨에게 돈과 정보가 몰리고 정부 요직 인선자료까지 보고받으면서 영향력을 행세했다. 현철씨 본인은 직함이 없었지만 동숭동팀 인사들을 청와대와 국정원, 정부 요직에 앉히고 ‘비선 보고’를 받으면서 국정을 좌우했다. 이후 ‘소통령’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끝내 정권 말기에는 한보사건에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철창신세를 졌다. 아버지인 YS는 임기말 아들 때문에 대국민사과를 해야만 했다.
사조직 핵심 인사들, 정권끝나고 모두 ‘철창행’
국민의 정부에서는 연청이라는 사조직이 있었다. DJ의 첫째 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이 이끈 연청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결성됐고 평민당과 국민회의 외곽 정치세력으로 활동했다. 특히 1997년 대선에서 아버지인 DJ의 당선에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2000년 11월에는 연청간부 560여명이 청와대에 초청돼 노고를 치하받기도 했다. 연청의 경우 기존의 사조직과 다른 점은 회원이 30만명수준이지만 전국적으로 풀뿌리 성격이 강했다. 또한 DJ는 ‘사조직의 폐해’를 우려해 재임 시절 당내 공식기구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30만명 회원중 대의원이 400여명에 당원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MB 정권의 외곽조직인 ‘국민성공실천연합’(이하 국실련)과 유사하다. MB 정권 탄생의 공신이지만 선진국민연대에 치여 있는 국실련은 전국 18개지부, 252개 지회, 35만명여 회원을 가진 조직이다. 박창달 자유총연맹 회장이 이끌던 ‘한국의 힘’의 후신으로 대의원이 3000여명에 달해 당밖에서보다는 당내 경선과정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연청 역시 사조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연청 부회장과 중앙위원 출신 인사들이 이권과 인사 청탁 혐의를 받고 정부 산하기관장에 대거 진출하면서 야당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특히 집권 3년차였던 2000년부터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등 김홍일 전 의원을 비롯한 외곽조직 실세들이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건이 터지면서 ‘3홍 게이트’(김홍일, 김홍업, 김홍걸)로 급속하게 레임덕에 휩쌓였다. 민주당에서 최근 사조직 ‘영포회’ 파문을 박영준 차장이 이끌던 ‘선진국민연대’로 확전하면서 ‘영포 게이트’, ‘박영준 게이트’로 규정짓는 배경이다.
노무현 정권의 사조직은 기존의 조직과 성격이 다르다. ‘월계수’나 ‘연청’, ‘동숭동팀’이 대통령 만들기위해 친인척이나 최측근이 나서서 사조직을 만들었다면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노사모)은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존재한다. 대신 이광재-안희정으로 이어지는 젊은 386 실세 집단과 부산/경남 친노 인맥들이 소모임을 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노 전 대통령과 ‘창업자 및 동업자’ 등 코드로 묶인 정파별 지역 조직으로 볼 수 있다.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pot.co.kr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