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지도자가 능력 펼칠 수 있게 기회주고 싶다”

현역 시절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진돗개’라는 별명을 얻었던 허정무 감독(55)이 한국축구국가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허 감독은 지난 2일 오전 10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결산 기자회견에 앞서 대표팀 감독직 재계약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허 감독은 “부족한 저를 믿고 감독직을 맡겨주신 대한축구협회(KFA·회장 조중연·이하 축구협회)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며 “이 자리에서 내 입장을 바로 전달하는 것이 차기 감독 선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팀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허 감독은 “물러나겠다고 말할 때 약간 떨렸지만,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후배 지도자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며 재계약 제의를 고사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차기 감독직 맡지 않겠다. 재충전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허정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지난 2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확고히 했다.
한국 축구의 역사에 새로운 길을 연 허 감독은 “차기 대표팀 감독 인선에서 물러날 것을 말씀드린다. 2년6개월 계속 달려왔다.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며 재계약 고사의 뜻을 전했다.
지난 2007년 12월 핌 베어벡 감독(54)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았던 허 감독은 2년 6개월 동안 대표팀을 이끌며 월드컵 출전 역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다음은 허정무 감독과의 일문일답.
-결정을 내린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가.
▲ 어떻게 보면 굉장히 멀기도 하고,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주변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오늘 서둘러 발표하게 됐다.
-16강전을 치르기 전인가, 아니면 직후인가.
▲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아공월드컵 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코칭스태프들에게 ‘결과에 상관없이 본선을 마친 뒤 시간을 갖겠다’고 이야기를 해왔다. 본선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축구협회 관계자들께 이야기도 했다. 고민이 됐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이 내가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다.
-축구협회는 경험 많은 감독이 대표팀을 길게 이끌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연임을 제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려해보지 않았는가.
▲ 축구계에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대표팀 발전을 위해 나도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다. 대표팀 감독직이 부담되는 자리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분들이 있다고 믿는다. 후임 감독이 훌륭하게 팀을 이끌어줄 것이다.
-2014브라질월드컵까지 축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싶다는 것이 유소년에 관심을 갖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 이번 본선을 통해 느낀 것은 남미 팀이 우리의 벽이라는 느낌이었다. 과연 어떤 점을 보완해야 다음 월드컵,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체력과 정신, 조직력은 결코 뒤지지 않지만, 볼 터치, 패스, 순간 상황 판단, 영리한 플레이 등 개인 기량은 뒤쳐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은 모든 축구인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점들을 연구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 나는 축구인으로서 너무 많은 혜택을 받았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한국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축구발전을 위해 헌신할 생각이다.”
-후임 감독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 현재 대표팀은 다 능력 있고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선수들로 채워져 있다. 앞으로 더 정진해주기 바라며, 후임 감독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굳이 여러가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다시 프로축구계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가.
▲ K-리그에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쪽으로든 축구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것이다.
-2년 6개월 간 대표팀 지도자로서 힘들었던 순간은.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은 없는가.
▲ 승부의 세계에 살다 보니 승패 여부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이 그렇지 않은 일보다 많은 것 같다. 축구쪽으로는 남미팀을 꼭 뛰어넘어 보고 싶고, 축구 외적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웃음).
-역대 감독 중 언론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지도자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언론에 대한 소회는.
▲ 언론에 대해서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을 보다 보면 선수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보이기도 한다. 잘못을 했을 때는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인신공격은 상대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런 풍토는 좀 바뀌었으면 한다.
-외국인 사령탑을 차기 감독으로 세우자는 의견도 있는데, 어떤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 잘못 얘기할 경우 난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국내 지도자가 대표팀을 이끌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와 기뻤던 시기는.
▲ 중국에 0-3으로 패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질 수도 있다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패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내 별명 중에 ‘오뚝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힘이 지도자에게는 필요하다고 본다. 본선에서 그리스를 이겼을 때와 16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기뻤다. 선수를 지도하는 감독 입장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차기 감독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 만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바람직한 범위 내에서 도울 방법은 있을 수 있지만, 전임 감독이라고 해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후임자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가족의 만류도 재계약 고사의 이유로 꼽히는데.
▲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매 번 마음고생을 하고 신경쓰는 모습이 미안했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만큼 잘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다.
-선수와 지도자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에 대한 느낌은.
▲ 지난 세 차례 월드컵에서는 항상 후회가 됐다. 이번 월드컵만큼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시나 끝나고 보니 (후회를) 안하게 될 수 없었다. 나는 내 몸이 움직이는 한, 축구계로부터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뉴시스 박상경 기자] skpark@newsis.com
#허정무, 승부근성으로 ‘진돗개’ 별명
허정무 감독(55)은 선수부터 트레이너, 코치, 감독까지 대표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를 거쳤다.
허 감독은 영등포공고, 연세대, 한국전력을 거쳐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PSV아인트호벤에 입단해 3년간 활약했다.
1986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한국이 32년 만에 본선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그 해 프로축구 시즌을 마친 뒤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1990이탈리아월드컵에서 대표팀 트레이너로 참가했던 허 감독은 프로무대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고 1998년 올림픽대표, 국가대표팀 감독에 동시 취임하게 된다.
당시 허 감독은 팬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무명이었던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영표(33·알 힐랄), 설기현(31·포항) 등을 발탁해 활용했다.
허 감독은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역대 최고인 2승1패를 기록했으나, 8강 진출 실패로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우승 실패의 책임을 지고 2000년 12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박지성과 이영표 등이 2002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선수발굴 능력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다시 프로무대로 돌아간 허 감독은 2007년 11월 대한축구협회(회장 조중연)의 요청을 받고 다음 달 핌 베어벡 감독(54)에 이어 대표팀 지도자로 복귀했다.
전문가 및 팬들은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허 감독이 대표팀에서 명예회복에 성공할지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그는 자율과 소통, 규율을 적절히 조합하며 대표팀을 이끌었다.
최종예선 무패(4승4무) 기록으로 7회 연속 월드컵 출전을 이뤄낸 그는 2010남아공월드컵에서 국내파 지도자 최초로 16강 무대를 밟은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2008년 1월 칠레와의 친선경기를 시작으로 2010남아공월드컵 우루과이와의 16강까지 허정무 감독이 이끈 한국 축구대표팀은 23승14무8패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이 기간 동안 A매치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패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태극전사들은 각종 경기에서 27경기 무패행진을 내달리며 좀처럼 지지 않는 팀으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강호들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전력과 정신력을 조련해 2010년 6월에 전국민이 축구로 하나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역사상 최초로 기억될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의 금자탑을 쌓은 허 감독은 정상에서 명예롭게 물러나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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