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에 장사 없다, 방심하면 무너진다!”

월드컵 본선무대가 시작되기 직전 베스트 11의 향방이 뒤집히는 경우는 자주 있다. 에콰도르전 2:0 승리 이후 예비엔트리 30명 가운데 4명을 걸러낸 허정무호는 남아공 본선을 겨냥한 실전 시뮬레이션에 돌입했다.
이미 베스트 11 가운데 상당수가 확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남은 평가전 내용에 따라 ‘허심(心)’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베스트 11을 뒤집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복병’이 바로 수문장 정성룡이다.
“경기장선 선·후배 따로 없다”
지난 24일 치러진 한일전의 2:0 완승은 정성룡의 무게감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세기의 라이벌인 한일전에서 극도의 긴장감에도 풀타임 출장해 매끄러운 선방을 보인 것은 플러스 요인이다. 더구나 자존심이 걸린 최대 격전에 허 감독이 정성룡 카드를 꺼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믿음이 적지 않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정성룡은 일본전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전반 31일 코너킥 상황에서 펀칭 실수를 저지른 점은 거슬리지만 후반 31분 모리모토의 강한 오른발 슈팅을 선방한 것은 높은 평가를 얻었다. 한 번의 실수를 제외하고 그의 경기 운영은 비교적 합격점이었다.
포지션 경쟁의 ‘무풍지대’로 불렸던 대표팀 수문장 대결에 정성룡의 선발 중용은 좋은 청량제가 될 수 있다. 이운재가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2년 선배 김영광(27·울산)과 피 튀기는 경쟁구도가 성립될 수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정성룡과 김영광, 두 수문장 모두 주전을 향한 욕심이 지대하다. 정성룡은 인터뷰에서 “경기장 안에서는 선·후배가 따로 없다”며 월드컵 출전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김영광 역시 “월드컵 출전 자체가 설렌다”면서도 “기회를 잡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객관적으로 본선무대에서 이운재보다 정성룡 카드가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모 축구해설위원은 지난 에콰도르전 이후 “그리스 선수들은 피지컬이 좋다”며 “키가 크고(190cm) 공중볼 처리 능력이 좋은 정성룡이 이운재보다 좋은 카드일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수비수로 시작”
타고난 체격조건과 안정감은 그를 국가대표 엘리트 수문장이자 소속팀의 붙박이 주전으로 만들어줬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성룡이 골키퍼 장갑을 꼈던 것은 아니다. 2008 베이징올림픽 대표 당시 그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이야기를 펼쳐놓았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수비수를 봤다”며 “원래 있던 골키퍼 친구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대타로 골문을 지키게 됐다. 시작은 우연이었는데 이후 적성에 맞아 골키퍼로 전향하게 됐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입학 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 가장이 되면서 정성룡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외아들로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는 생전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신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그는 인터뷰에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게 좋은 기억만 주셨다”며 “생전에 항상 ‘무슨 일이든 시작했으면 끝을 보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축구선수, 골키퍼의 길에 들어선 이상 그 말씀대로 ‘끝’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커갈수록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 정성룡은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든 경우다. 그는 지금도 힘이 들거나 고비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시련에 부딪쳐 아파하는 것보다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정성룡은 고비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떠난 뒤 정성룡은 구체적인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프로구단 입단, 국가대표 발탁, 해외진출’이 그것. 18살이 되던 해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고, 2008년 7월 이운재, 김용대 등 선배들과 나란히 아시안컵 대표로 선발되며 두 가지 목표는 이루었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정성룡을 키운 마음속 다짐도 자랐다. ◆연습에는 장사 없다. ◆죽을 만큼 노력하자. ◆안심하면 무너진다. ◆불안하면 연습하자. ◆나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정성룡이 심장에 새긴 5계명이다. 2년 전 겨울 미모의 아내와 가정을 꾸린 뒤 그의 5계명은 더욱 굳어졌다.
1등만 기억하는 월드컵 무대에서 갈 길이 바빠진 것은 ‘1인자’ 이운재다. 통산 네 번째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서는 이운재는 1994년 미국 월드컵과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국내 최강 수문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마저 석권하며 사실상 대표팀 골문의 전임자가 됐지만 그의 아성에 최근 급격히 흠집이 나고 있다.
대표팀 2인자는 필요 없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 대표팀의 무패행진을 진두지휘했지만 소속팀의 추락 앞에선 장사 없었다. 지난 3월 이후 소속팀 수원이 극심한 부진에 휘말리며 ‘국민 골키퍼’ 역시 다실점의 멍애를 안아야 했다.
이운재는 올해 정규리그 9경기에서 무려 18점을 허용하면서 경기당 2실점의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대표팀에 입성했다. 허 감독이 최근 정성룡 중용론에 힘을 실은 것 역시 이운재의 경기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운재의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경기 운영력은 여전히 정성룡보다 한수 위다. 정성룡 자신도 “운재형은 경험이 많고 수비 리드가 뛰어나 내가 배워야 할 게 많은 선배”라며 “나도 처음에는 나이가 어려서 수비 리드가 어색했지만 다른 골키퍼보다 골킥의 거리가 긴 게 나의 옵션이다. 특기를 잘 살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골을 넣어야 이기는 축구에서 골키퍼는 가장 외로운 포지션으로 꼽힌다. 10년 넘게 혼자 부담을 짊어져온 이운재를 이어 젊은 피의 등극이 현실로 이뤄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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