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회장님, 선수들도 Thank U!

지난해 2월 박용성(69) 두산그룹 회장이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출되자 국내 체육계에 상당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매달 판공비 300만원 정도를 받는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대한체육회 수장은 오랜 권력의 상징이었고, 그 자리에 정치인이 아닌 재벌 경제인이 오른 것은 이례적인 까닭이다.‘스포츠계 대통령’으로 불리는 체육회장직은 정권 실세들이 꼭 한번 거쳐야할 엘리트 코스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인 박 회장의 취임은 국내 체육계 권력구도의 재편을 뜻한다. 2000년대 이후 체육회 권력의 추는 정치인에서 경제인으로 기운 모양새다. 실제 대한체육회 산하 55개 가맹 단체장의 출신 성분을 분석해보면 그룹총수 등 경제인이 가장 많고 뒤를 이어 정치인, 체육인, 언론인 순이다. 일선 단체 직원들도 막대한 재력을 갖춘 기업인 회장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다. 정치인 단체장이 홍보효과는 크지만 비인기종목일수록 실제 협회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기에는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스포츠계를 장악한 체육권력의 진면목을 집중 분석했다.
박용성 회장의 체육회 입성 이후 체육계의 권력지도가 수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국내 체육단체장은 하나의 정치권력이며 강력한 파벌경쟁의 상징이다.
여전히 정치인들은 표를 몰아주는 ‘조직’을 얻기 위해 스포츠와의 동거를 꿈꾼다. 특정 인사를 지원하려는 정부의 입김도 매서웠다. 매번 유력 체육단체장 선출 과정에서 흑색선전과 육탄전이 난무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체육회장 출신 조병옥·이기붕·노태우
역대 체육회장은 대부분 권력 실세나 친정부 이사들의 독무대였다. 역대 주요 회장을 짚어보면 윤치호(9대), 조병옥(16대), 이기붕(17대), 이철승(18대), 박종규(25대), 노태우(28대), 김정길(35대)씨 등 정권 주요 인사들이 연이어 체육회 수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익히 알려진 대로 대한체육회의 권위는 막강하다. 사실상 국내에 보급된 모든 체육종목에 해당하는 총 55개 가맹 경기단체의 수장이며 이에 따른 국내·외 지부도 모두 체육회 밑에 있다.
체육회장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으로 국내 올림픽 관련 업무도 주무를 수 있다. 이에 따라 집행할 수 있는 예산도 매년 1300억원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본거지인 태릉선수촌 내부 인사도 모두 체육회장의 인가로 이뤄진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행사를 사실상 총괄하는 체육회장과 이를 이용해 지지율을 높이려는 정부의 ‘끈끈한 관계’는 당연하다. 비단 대한체육회뿐 아니라 산하 단체들 역시 정치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여당 의원들이 대거 산하 단체장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8년 대한태권도회장에 취임한 홍준표 의원이다. 또 대한야구협회장으로 재직한 강승규 의원, 대한배구협회장에 오른 임태희 의원 등이 여당 출신 단체장으로 꼽힌다.
이들 단체의 수장은 모두 선출직이지만 내부의 ‘암묵적인 지지’를 업고 대부분 손쉽게 해당 조직에 입성한다. 반면 야당 의원으로는 대한농구협회장에 올랐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유일하다.
야당 출신은 홀대?
권력자의 ‘후광’을 업고 단체장에 선출됐지만 상당수는 금방 좌초위기를 맞곤 한다. 가장 흔한 경우는 관련 업계와 종목에 대한 무지로 실무직원들과 엇박자를 내는 경우다. 일부는 연임을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죄를 쓰고 단체 내 공적(公敵)이 되는 일도 있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대표적인 단체는 바로 야구협회와 농구협회다. 여당 출신 강승규 회장은 협회 정년이 끝난 인사를 신임 사무처장으로 앉히는 등 마구잡이 인사를 펼쳐 신임을 잃었다. 가뜩이나 프로야구에 밀려 뒷방신세로 밀린 야구협회 직원들로서는 서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야당 의원으로 체육단체장 연임에 성공한 이종걸 대한농구협회장은 ‘부정선거’ 논란에 휘말려 곤혹을 치렀다. 그는 지난해 치러진 회장 선거에서 라이벌 정봉섭 대학연맹 명예회장을 단 1표 차로 누르고 신승을 거뒀다.
그러자 150명의 농구인들이 투표에 참여한 대의원의 자격 없음을 주장하며 ‘부정선거 무효’ ‘현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는 등 잡음이 인 것. 당시 일각에서는 ‘야당 출신’ 단체장을 낙마시키기 위한 흠집 내기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 회장은 ‘농구협회’ 명의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진화했지만 농구협회의 갈등은 여전히 ‘휴화산’에 불과하다.
지난해 국기원 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홍준표 태권도협회장은 내부 파벌싸움에 밀린 경우다. 2008년 6월 태권도협회 수장에 오른 홍 회장은 내심 국기원장 자리를 욕심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승완 국기원 이사, 임윤택 서울시태권도협회장 등 최측근이 줄줄이 폭행과 비리혐의로 경찰 수사대상이 되자 국기원에 이사직 사표를 던졌다. 1년 넘게 법정공방을 불사하며 힘겨루기를 벌였던 국기원의 파벌싸움은 유력한 원장 후보였던 홍 회장이 발을 뺌에 따라 일단락됐다.
“통 큰 회장님 환영합니다!”
지난해 9월 개봉해 700만 관객몰이를 한 영화 ‘국가대표’는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단의 열악한 훈련과정과 성공 신화를 재조명해 큰 관심을 얻었다. 비단 스키점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마추어 종목들의 현실은 이와 다르지 않다. ‘쥐꼬리’만한 체육회 지원으로는 선수들 유니폼마저 사기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단체 입장에서 가장 반가운 ‘회장님’은 바로 막강한 재력을 가진 기업총수다. 핸드볼의 최태원 SK회장, 탁구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양궁의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 사이클의 구자열 LS전선 회장 등은 스포츠계 소문난 큰손이다.
특히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수록 기업인 단체장의 후원 규모는 훨씬 더 크다. 단체 입장에서는 두둑한 지원금을 챙기고 기업들은 해당 선수들을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잃을 게 없는 장사다.
기업인들이 아마추어 종목에 투자하는 데 비해 정치인들은 상대적으로 축구, 야구, 배구 등 인기 프로 스포츠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 최장수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낸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좋은 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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