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번만 져라. 사례는 톡톡히 할게”

한국e스포츠협회는 전·현직 프로게이머 10여 명이 불법 베팅 사이트를 개설하고 승부조작을 통해 거액의 배당금을 챙긴 의혹과 관련해 지난달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연습 동영상 빼내 전략 파악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부장 위재천)는 불법 베팅 사이트 운영자와 브로커를 자청한 전직 프로게이머를 추적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검찰은 또 최근 e스포츠협회 김모 국장 등 인사들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실시했다.
e스포츠협회 관계자는 지난 14일 “문화체육관광부 등과 협조해 불법 베팅 사이트를 지속적으로 체크해왔지만 해외에 서버를 두고 수시로 옮겨 다녀 추적이 어려웠다”며 “전·현직 선수들이 연루된 승부 조작 의혹이 불거진 만큼 수사기관에 의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스타크래프트 등 e-스포츠 경기에 금품을 거는 것은 명백한 불법 도박이다. 국민체육진흥법 시행령에 따라 합법적으로 발행되는 스포츠토토 복권이나 경마, 경륜, 경정 등 특별법으로 허용된 종목에 한해서만 돈을 걸 수 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속칭 ‘놀이터’라 불리는 불법 웹사이트를 통해 스타크래프트 경기의 승부를 놓고 적게는 10만원 안팎, 많게는 수백만원씩 베팅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업계에 따르면 해외 서버로 운영되는 이들 사이트는 인터넷 게임 카페 등을 통해 극소수의 회원에게만 개설 사실을 알리고 베팅을 주도한다. 특히 단속이 임박했을 경우 서버를 옮긴 뒤 회원들에게 휴대전화로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는 등 ‘떴다방’ 식으로 운영돼 수사망을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프로게이머 출신인 사이트 운영자와 브로커는 주로 후배 프로게이머를 회유해 승부조작에 가담시켰다. 프로리그나 개인리그에서 성적이 좋은 후배에게 접근해 “경기에 져 주면 사례금을 주겠다”는 식이다.
이들은 베팅 참가자들이 성적이 좋은 게이머에게 돈을 거는 점을 거꾸로 이용해 상대 선수에게 베팅하고 거액의 배당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커들은 또 프로게임단 연습생을 돈으로 매수한 뒤 유명 선수의 연습 동영상 파일을 불법으로 빼내기도 했다. 해당 선수의 전략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선수 생명이 짧고 박봉에 시달리는 연습생들은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사실상 어렵다.
“야구, 축구 등 불법 베팅 성행”
e-스포츠 승부조작이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불법 베팅이 이뤄진 사이트 운영 실태에도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들 불법 베팅 사이트가 기존 야구, 축구, 농구, 해외 스포츠 등에서는 이미 일반화됐으며 최근 e-스포츠가 새로운 종목으로 추가돼 운영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스포츠토토 등 합법적인 베팅이 가능한 기존 종목은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판돈이 오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e-스포츠 베팅은 비정기적으로 벌어졌다. 관심이 많이 쏠리는 인기 선수들 간의 경기나 인기 팀이 단체전을 벌일 때가 타깃이 된다. e-스포츠 특성상 1:1 개인전이 기본이기 때문에 승부조작이 더욱 용이했던 것도 약점이 됐다.
무엇보다 문제의 사이트가 속칭 ‘떴다방’ 식으로 운영돼 단속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도 파문을 키웠다. 기본적으로 회원가입을 통해서만 이용할 수 있으며 해외에 서버를 둬 단속되더라도 사이트 차단 밖에는 처벌이 불가능했던 것.
사이트가 차단되더라도 운영진은 새 사이트를 열고 기존 회원들에게 이메일, 휴대전화 등을 통해 이를 공지하는 식으로 도박판을 계속 열 수 있었다. 또 일부 포털의 카페 역시 이들 사이트의 홍보역을 하며 지속적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수많은 불법 베팅 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실제 검거 사례가 전무했던 것도 이런 속사정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e스포츠협회는 스타크래프트 승부 조작 문제가 제기되자 최근 프로리그의 출전 선수 명단을 사전에 예고하던 기존 진행 방식을 경기 당일 현장 공개로 변경했다. 선수와 브로커의 접촉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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