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쇼트트랙 고질병 ‘파벌전쟁’ 내막

대한민국 동계스포츠의 ‘국기(國技)’ 쇼트트랙이 흔들리고 있다.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정수(단국대)의 2010 세계쇼트트랙 선수권 개인전 불참을 둘러싸고 ‘외압’과 ‘파벌싸움’이라는 고질병이 또다시 도졌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건은 지난 3월 24일 전 국가대표 안현수의 부친 안기원씨가 인터넷을 통해 올린 글을 통해 촉발됐다. 안씨는 글을 통해 “이정수가 세계선수권 당시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외압에 의해 개인전에 불참했다”고 폭로했다. 빙상연맹이 즉각 이정수의 자필 사유서를 공개하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안씨가 “(사유서는)조작된 것”이라고 맞서며 진실게임으로 비화된 양상이다. 사건 발생 나흘 만인 지난달 29일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시로 대한체육회는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특히 이번 파문이 2000년대 초부터 줄곧 불거졌던 쇼트트랙 파벌 싸움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한민국 쇼트트랙을 둘러싼 파벌전쟁의 내막과 사건 막후를 들여다봤다.
코치진이 특정선수에게 대회 불참을 종용했다는 이른바 ‘외압논란’에 대해 체육회의 감사가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당사자인 이정수는 “지금은 할 말이 없다”며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제기된 의혹에 대해 명확히 부정하지 않고 있어 궁금증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이정수, 외압논란 “노코멘트”
이정수를 비롯한 한국 남녀 쇼트트랙 대표팀은 지난달 30일 세계팀선수권을 끝으로 귀국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세계선수권과 세계팀선수권에서 연달아 좋은 성적을 냈지만 ‘외압논란’으로 선수단 분위기는 침울하다. 선수단 역시 체육회 감사에 응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정수는 이날 입국 기자회견에서 “지금으로서는 당장 할 이야기가 없다. 일단은 쉬고 싶다”며 말을 아꼈다. 체육회 감사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는 얘기다. 반면 남자 대표팀 김기훈 감독과 빙상연맹은 “외압논란은 없었다”며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김 감독은 “이정수가 발목이 아프다고 해 최종 엔트리에서 뺐고 연맹에 통보했다”며 “외압은 절대 없었다. 체육회 감사에서 성실하게 답변하겠다. 오해가 있었다면 곧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빙상연맹은 안씨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다음날 곧바로 보도자료를 통해 해명에 나섰다. 지난달 25일 빙상연맹은 언론 보도자료를 내고 “인터넷상에서 회자되고 있는 여러 내용들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있어 해명하고자 한다”며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먼저 이정수가 부상이 아닌 외압에 의해 세계 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 빙상연맹은 이정수 본인이 지난달 17일 김 감독에게 제출한 자필 사유서를 증빙자료로 제시했다. 사유서는 이정수 본인의 자필로 작성되어 주민등록번호와 서명까지 적힌 것이다. 여기엔 “본인 이정수는 09-10년 세계 선수권 대회 개인 종목에 올림픽 이후 지속되어온 오른쪽 발목 통증으로 인해 출전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기에 사유서를 제출한다”고 돼있다.
빙상연맹은 이어 “선발전의 시기와 방식은 특정 선수들의 사정에 초점을 맞추거나 배려를 할 수 없고 대회에 참가하는 전체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특정 선수 때문에 일정을 바꾼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빙상연맹의 해명에도 처음 외압논란을 주장한 안기원씨는 또 다시 정면으로 반박하며 새로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이정수가 제출한 사유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얘기다.
안씨는 지난달 2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자필 사유서 역시 강압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안씨는 “그런 일(사유서 제출)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며 “오랫동안 국가대표생활을 했던 아들(안현수)의 경우 단 한 번도 부상으로 자필 사유서를 쓰고 대회에 불참한 경우가 없다”고 밝혔다. 선수가 부상을 입었을 경우 진단서를 첨부하고 직접 이야기하는 게 관례였다는 얘기다.
안씨 “전명규, 유태욱 부회장 전횡 심각”
안씨는 또 빙상연맹의 유태욱, 전명규 두 부회장의 전횡이 심각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쇼트트랙계의 파벌싸움은 막을 내렸지만 두 명의 부회장이 실권을 휘두르며 또 다른 부작용이 불거졌다는 얘기다.
그는 “파벌은 2008년도 연맹의 두 부회장이 들어오면서 끝났다. 파벌은 어느 정도 종식이 됐다”면서도 “그런데 이 두 분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코치도 마음대로 선임하고 코치들은 힘이 없다”고 주장했다.
전명규 부회장은 과거부터 ‘쇼트트랙 파벌 문화’를 가져온 장본인으로 지목돼온 인물이다. 최근 한 빙상팬은 ‘쇼트트랙 파벌 역사 총정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그 간의 쇼트트랙 내 갈등을 분석해 상당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 팬은 1990년대~2002년 10월까지 전명규 당시 대표팀 감독이 남녀 대표선수단을 모두 지도한 뒤 한국체육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른바 한체대vs비한체대의 파벌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전명규 현 부회장은 한국 쇼트트랙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지도자이지만 오랜 독재 체제 아래서 훈련받았고 안 좋은 일들이 많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둬 비판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 부회장은 팀플레이를 강조하면서 대표팀 ‘에이스’로 꼽히는 특정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도록 다른 선수들을 ‘희생’시켰고 이런 이유로 해외에서는 한국의 실력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는 것이다. 전 부회장은 한체대 교수로 재직 중 유망주를 독식하려 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3년 이후 이른바 ‘안현수vs비안현수’ 갈등이 불거졌다는 주장도 있어 눈길을 끈다. 2003년 6월~2004년 10월 당시 김기훈 코치가 남자 대표팀을 이끌면서 안현수라는 실력파를 발굴했지만 이후 안 선수만 집중육성하면서 다른 선수들의 반감을 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안현수가 파벌싸움의 희생양이 아닌 수혜자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김 코치가 부친이 운영하는 빙상장비 회사와 관련 비리 혐의가 적발돼 대표팀을 떠나지만 2005년 복귀한 뒤 쇼트트랙 파벌전쟁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파벌 간 코치 쟁탈전이 벌어진 것은 물론 일부 코치의 제자 편애, 그리고 심지어 상대 파벌 선수를 방해하라는 명령과 대표 선발전에서의 부정으로 얼룩지게 됐다는 얘기다.
결국 안씨가 주장한 ‘두 부회장의 전횡’은 고질적인 파벌전쟁을 이끌어온 전명규 부회장의 비정상적인 영향력을 꼬집은 것일 수 있다. 체육회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만큼 쇼트트랙계의 갈등이 봉합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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