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의 불행해보이는 얼굴이 맘에 걸렸다”

호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여왕의 기개는 죽지 않았다.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시험대를 눈앞에 둔 김연아(19·고려대)가 ‘값진 실패’를 경험했다. 지난 16일 2009-2010 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연거푸 실수를 범한 그는 자신의 최고점(210.03점)에 무려 22.05점이나 떨어진 187.98점을 받았다. 그러나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48) 코치에게서 낙담한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내달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그랑프리 파이널을 비롯해 지금까지는 올림픽 황금 신화를 이룩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까닭이다. 김연아를 세계 최고의 스케이터로 키운 오서 코치는 이번 대회에서도 제자를 향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취재진과 만난 그는 “연아는 스스로도 감정 조절을 잘하는 선수”라며 “음악이 시작되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연기에 몰입한다”고 김연아를 추켜세웠다. 지난 3년 동안 ‘여신’ 김연아를 강림시킨 오서 코치는 지난 8월 자서전을 발간했다. 그는 책에서 제자와의 첫 만남부터 오늘의 성공스토리를 공개해 화제를 일으켰다. 오서 코치의 저서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웅진지식하우스)에 담긴 두 사람의 인연과 시련, 눈물의 성공기를 집중 조명했다.
“최고의 스케이터가 되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목표는 최고가 되길 원하는 연아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는 것이다.”
“첫인상? 깡마르고 무표정한 동양소녀”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단단하다. 김연아는 과거 인터뷰에서 “오서 코치님은 내게 딱 맞는 스승이다. 내가 빙판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이라 말했고 그의 지도 스타일을 착실히 따랐다.
80년대 ‘미스터 트리플 악셀’로 불리며 정상급 스케이터로 활약했던 오서 코치 역시 제자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믿음의 결과는 3년 만에 ‘세계 정상’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
오서 코치와 김연아의 첫 만남은 200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게 있어 처음 만난 김연아는 ‘깡마르고 무표정한 동양소녀’에 불과했다. 당시 토론토 스케이팅 클럽의 지도자였던 오서 코치는 3주 동안만 김연아에게 점프 강습을 담당한 강사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얼음판 위에 선 김연아를 본 오서 코치는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제자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가 스케이트화를 신고 링크에 내려선 순간, 교정기를 낀 수줍은 소녀는 사라졌다. 나는 연아의 재능과 속도감 그리고 전문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기술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니, 차라리 감동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김연아의 실력은 오서 코치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그는 ‘연아의 스승이 돼 달라’는 김연아 모친의 제안을 수차례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당대의 피겨스타였던 그는 아이스쇼와 공연일정을 연달아 소화해야 했을 뿐 아니라 코치직을 본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그러나 김연아의 모친은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고 마침내 최고의 명장과 최고의 제자가 한 팀으로 묶일 수 있었다.
“연아, 큰 대회 앞두면 돌변”
첫 제자를 받은 오서 코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과연 뭘까. 그는 “우선 무표정한 연아를 웃겨야 했다”고 밝혔다. 김연아는 정확한 기술 구사와 빠른 스피드, 유연성 등 눈부신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거의 화난 사람 같은 얼굴로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는 것이다.
오서 코치는 책에서 “그녀의 불행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며 “어린 꼬마숙녀가 멋진 스케이팅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는 수줍음 많은 소녀의 자기단련법이라는 걸 오서 코치는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김연아가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풍부하게 쏟아낼 수 있는 감수성 풍부한 10대 소녀라는 걸 간파했다. 오서 코치와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은 훈련 내내 끊임없는 익살과 농담으로 ‘얼음공주’의 심장을 녹였다.
오서 코치는 제자의 유일한 단점으로 ‘지나친 연습’을 꼽았다. 그는 “연아는 완벽주의자”라며 “특히 그랑프리 시즌이 다가오면 연아는 연습 분위기부터 변한다. 집중력과 몰입도가 상당히 강해지고 부상을 피하기 위해 몸을 바짝 긴장시킨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경우 최고의 실력을 닦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슬럼프에 빠지기도 쉽다. 완벽주의자의 함정이란 얘기다. 오서 코치는 “압박감이 너무 심하면 연아가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며 “그럴 땐 마음껏 울 수 있게 해준다. 모든 감정을 링크에 쏟을 수 있기에 훌륭한 연기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8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부상에 시달리던 김연아와 단 둘이 얼음판에 마주섰던 경험을 토로하며 어린 제자가 좌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고 밝혔다. 김연아는 심각한 고관절 부상을 입고도 동메달을 차지했다. 오서 코치는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연아는 6주 만에 얼음판 위에 섰을 만큼 큰 부상을 입은 뒤였다. 나는 부상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연아를 얼음판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빙판 위에는 트레이너도 연아 어머니도 없이 나와 연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얼음판을 지치면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연아가 스케이팅을 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을 참고, 야단법석 떨지 않고, 심지어 미소까지 잃지 않는 연아의 모습이, 그녀가 좌절에 대처하는 방식이 나는 너무 좋았다.”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가 연기를 펼치는 동안 링크 밖에서 동작을 따라하곤 한다. 제자가 점프를 하면 구둣발로 함께 뛰어오르고, 우아하게 스핀을 하면 역시 유려한 손짓을 해 보이는 것. 국내 팬들 사이에서 오서 코치의 이런 모습은 우스갯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관객들의 반응에 오서 코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은 의식하지 않는다. 난 연습 때 늘 연아와 함께 스케이트를 탄다. 매일 함께 훈련한 코치가 밖에서 응원하는 게 연아에게 힘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최선을 다한 제자를 향해 아낌없는 칭찬을 건네는 것도 오서 코치의 지도법이다. 그는 연기를 마친 김연아가 링크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는 격려를 잊지 않는다. 물론 빈말이 아니다.
“말 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아가 자랑스럽다.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연아도 야단스러운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고를 향해 가는 길의 외로움과 즐거움을 이심전심으로 잘 알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최고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말이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가 오래오래 선수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김연아가 가는 길이 바로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가 될 것을 믿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는 김연아가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길 바란다. 행복한 스케이터는 스케이팅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케이트가 주는 속도감과 자유로움이 마냥 좋아서 스케이트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김연아가 끝까지 스케이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오서 코치의 소망이다.
“2009년 연아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때. 나는 연아가 자신이 그 자리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기 바랐다. 연아는 팬들의 응원에 최선을 다해 답하려 하고,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려 애쓴다. 하지만 가끔은 지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다.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미스터 트리플 악셀’ 브라이언 오서는 누구?
1961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오서는 네 살 무렵 누나를 따라갔다가 우연히 스케이트를 접했다. 그는 스케이팅의 속도감과 자유로운 감각에 매료됐고 1979년 세계에서 두 번째, 주니어 선수로는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 연기에 성공,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1~1988년까지 8년 연속 캐나다 챔피언에 올랐고 1984년 사라예보 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다.
1986년 캐나다 멤버 훈장과 1989년 캐나다 오피스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09년 3월 세계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1980년대 전설적인 스케이터로 명성을 날렸던 오서는 지도자로 변신한 지 1주일 만에 김연아를 만났다. 어린 김연아를 피겨여왕으로 만든 그는 세계적인 명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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