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스포츠스타 ‘술자리 잔혹史’
집중탐구-스포츠스타 ‘술자리 잔혹史’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10-27 14:09
  • 승인 2009.10.27 14:09
  • 호수 809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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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샘물’에 홀려 훅~간 그라운드 스타들
왕기춘 · 정수근(우)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가 샘솟는 마법의 물, 바로 술이다. 스트레스에 찌든 소시민들이 얼큰한 소주 한 잔에 하루치 시름을 날리는 것은 오랜 과거부터 이어진 낭만이다. 이처럼 지인들과 즐기는 조촐한 술자리를 꺼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물론 ‘몸이 재산’인 스포츠 스타들도 ‘술자리’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 피 튀기는 경쟁에 내몰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는 선수들에게 술 한 잔의 여유는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유불급, 사건은 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데서 벌어지는 게 아닌가.

더구나 운동선수를 비롯한 공인에 대한 잣대가 엄격한 우리나라에서는 ‘음주파문=중징계or퇴출’일 만큼 섬뜩한 죄목이다. 특히 프로·대표급 선수들이 중요한 대회나 시합을 앞둔 상황에서 술집에 드나들었다가는 발견 즉시 척살감(?)이다.

지난 8월 음주 시비 논란으로 결국 은퇴를 선언한 야구선수 정수근(32·전 롯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정수근은 난동을 부린 증거가 전혀 없고 신고자가 허위 신고를 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은퇴라는 극약처방으로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최근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왕기춘(21·용인대)과 프로농구 전주 KCC 허재(44) 감독이 술자리 폭행 논란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물론 사건을 들여다보면 두 사람 모두 정수근처럼 억울한 오해에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스포츠 스타의 발목을 잡는 술자리 잔혹사를 <일요서울>이 집중 분석했다.

“나를 찾지 마세요.”

약관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하루아침에 ‘야인’을 자처했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에게 손을 댔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왕기춘은 지난 18일 새벽 서울 강남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동석한 20대 여성의 뺨을 때려 경찰 조사를 받았다. 상대여성이 순순히 합의에 응한 덕분에 사건은 일단락 됐다.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그러나 왕기춘 본인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인터넷 팬카페 게시판에 은퇴를 시사하는 짤막한 심경을 밝힌 뒤 잠적했다. 지난 8월 유도 세계선수권대회를 재패하며 세계적인 유도스타로 자리매김한 그가 전국체전을 불과 사흘 앞 둔 지난 20일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왕기춘은 경찰 조사를 받은 직후인 지난 18일 자신의 팬카페에 ‘다들 아시다시피’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여자에게 손을 댔으니 공인이 아니어도 큰 죄고 죄송하다”고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왕기춘은 또 “더 죄송한 것은 앞으로 매트에 서는 제 모습을 못 볼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기라는 것을 해본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선수 생활을 접겠다는 뜻을 선언한 셈이다.

전국체전 유도 대학부 73kg 이하급 경기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왕기춘이 홀연히 종적을 감추자 그의 연고지인 경기 유도회와 모교 용인대는 발칵 뒤집혔다. 왕기춘의 부친이 나서 “기춘이는 시골 친척집에 머물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 밝혔지만 폭탄 발언 이후 유도계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멱살만 잡았는데 “뺨 맞았다”

프로농구 KCC 허재 감독도 최근 술자리 시비에 억울한 눈물을 흘렸다. 지난 15일 현역시절 명콤비였던 강동희 감독이 이끄는 동부에 첫 패배를 안은 뒤 늦은 밤 포장마차를 찾은 게 화근이었다.

다음경기를 위해 부산으로 건너간 허 감독은 최형길 KCC 단장과 해운대 인근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옆 자리 손님과 가벼운 시비가 붙었다. 그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박모(34)씨가 반말로 욕설을 퍼붓자 분을 참지 못하고 멱살잡이를 했다.

문제는 박씨가 경찰에서 “허재 감독이 뺨을 때렸다”며 자신을 폭행 피해자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과거 음주운전과 폭행사건으로 빈번히 ‘문제아’ 소리를 듣던 허 감독이었기에 언론은 일제히 ‘허재 감독 음주폭행 혐의 입건’이라는 제하로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허 감독은 “결코 때린 사실이 없다”며 “시비는 있었지만 때리지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다”고 항변했다. 사건은 양측의 합의로 종결 처리됐지만 시즌 개막부터 호된 액땜을 한 허 감독의 속은 시커멓게 탄 셈이다.

허재 감독은 국내 스포츠 스타 가운데 음주 사고를 가장 많이 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만큼 술과 얽힌 악연이 깊다는 얘기다. 허 감독은 지난 93년 득남축하연에서 소주를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100일 간 면허정지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코트의 풍운아’로 불렸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나이트클럽에서 폭력을 휘둘러 입건된 전력도 있으며 이듬해인 95년에는 음주 상태로 차 사고를 내 면허가 취소되기도 했다. 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 도중 팀 동료들과 생일파티 겸 ‘약간의’ 술을 마신 죄로 6개월 출전 정지를 당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무면허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허 감독의 화려한 전과(?) 탓에 가벼운 시비에서 ‘폭행 혐의’로 비화된 것으로 보인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의 허 감독이 과거와 달리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토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말, 상욕 다 참고 해탈하라는 건가”

술자리 시비로 구설수에 오르는 유명인사들 가운데는 유독 프로 스포츠 스타가 많다. 특히 포장마차나 나이트클럽처럼 일반인과 섞이는 장소에서 크고 작은 소동이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지난 9월 음주 난동 의혹으로 은퇴한 정수근과 올해 2월 대전 시티즌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축구선수 고종수(31)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물론 술자리 시비에 엮인 선수들도 할말이 많다. 먼저 ‘기본도 안 된’ 팬들이 너무 많다는 것. 술자리에서 마주친 일반인들이 팬을 자처하며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경기 중 일어난 일을 들먹이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얘기다.

프로축구선수로 국가대표팀에 몸담고 있는 K씨는 “아무리 봐도 한참 어린 친구들이 ‘야’ ‘너’하며 함부로 말을 걸면 한 순간 화가 치밀 때가 많다”며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한순간 욱해 사건에 휘말리기 쉽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또 다른 축구선수 S씨는 “선수들도 사람이다. 경기를 망치고 주전에서 밀리면 친구들에게 하소연도 하고 싶고 술도 한 잔 하고 싶다”며 “물론 경기를 앞두고 과음을 하는 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비(非)시즌 중에도 팬들이 ‘네가 그딴 식으로 하니 안 되는 거다’라는 등 시비를 걸거나 코칭스태프에게 ‘투서’를 하면 정말 속이 상한다”고 하소연했다.

S씨는 또 “심지어 몇 해 전엔 친구들과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사이다를 마셨는데 구단에는 ‘폭음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선수들의 볼멘소리는 높지만 대선배들의 조언은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다. 시장이 좁고 서열문화가 엄격한 국내 스포츠 무대에서 잦은 사건사고에 연루되면 생수 생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프로축구 조광래(55) 경남 감독은 “선수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얼굴이 알려진 스포츠 스타라면 최대한 시비 거리를 만들지 않는 게 기본 도리다. 그게 스포츠인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조 감독은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10년 이상 프로구단 지도자를 맡아 활약한 베테랑 지도자다. 그는 또 “일련의 사건과 관련해서는 스타를 한 명의 인격체로 봐주는 팬들의 따뜻한 배려가 못내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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