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이대로는 안된다”
“프로야구 이대로는 안된다”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06-23 15:30
  • 승인 2009.06.23 15:30
  • 호수 791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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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구단 입김 시달리는 ‘2군인생’ 불쌍하지도 않은가”

“연봉협상이요? 협상이 아니라 ‘통보’죠. 연봉 100만원 인상되면 구단이 ‘너 100나왔다. 더 이상은 한 푼도 못줘’라고 못 박아 버려요. 연봉 2000받는데 솔직히 1년에 100만~200만원 올려 받는 게 의미가 있나요? 한달에 방망이 값으로만 고스란히 200만원씩 나가는 걸요.” (모 프로팀 2군 A선수)

“운동선수가 자기 몸 챙기기도 힘든데 마누라에 자식까지 있어 봐요. 연봉 2000~3000만원으로 생활이 되나. 2군에 있으면 저축은커녕 먹고사는 게 힘들죠. 2군 선수들은 그래서 노총각으로 늙어요.” (모 프로팀 1군 B선수)

프로야구 선수들이 뿔났다. 수억원에 달하는 연봉과 특급 대우를 받는 극소수의 스타플레이어에 가려져 서러운 세월을 보낸 프로야구선수들의 울분이 지난 12일 국회에서 터져 나왔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회장 손민한·이하 선수협회)는 각 구단 선수들의 열악한 실태를 담은 ‘선수 인권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는 ‘프로야구 제도 및 선수 인권 실태 토론회’도 열렸다. 천정배·최문순 민주당 의원,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마해영 엑스포츠 해설위원, 이시형 선수협회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토론회에서는 프로야구 선수노조 설립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학창시절 죽도록 운동만 한 젊은 선수들이 한낱 ‘빛 좋은 개살구’ 신세로 전락하는 예가 부지기수라는 야구계의 성난 목소리를 들어봤다.

표류 중인 프로야구 선수노조 설립이 추진력을 받을까. 이날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선수들은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등 개인 장비 값을 물고 나면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의 박봉에 시달릴 뿐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절차에 불과한 연봉협상 과정의 불합리함에 높은 반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35세 정년퇴직’ 웃고 있어도 눈물난다

이번 조사는 협수협회의 의뢰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3일~8일까지 프로야구 선수 103명(1군 33명, 2군 68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여론조사 결과 대부분의 선수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연봉삭감이나 방출 등 불이익을 받을까 구단에 적극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는 실정인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기본적인 생활을 보호받기 위한 선수노조의 필요성에 상당수 선수들이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프로야구선수들은 본인의 직업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은퇴 뒤 불확실한 진로와 연 2000만원 수준인 최저연봉제도 등에 상당한 불만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63.1%는 프로야구선수라는 직업에 ‘매우 만족한다’라고 답했고 31.1%가 ‘비교적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94.2%에 달하는 선수들이 ‘은퇴 뒤 생활에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80.6%의 선수들은 현재 연봉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층면접조사에 응한 한 중견 선수는 “보통 사람들은 야구선수들이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퇴직금이 없고 35살이면 이른바 ‘정년’을 맞는다. 그때까지 받은 연봉으로 평생을 꾸려가야 하기 때문에 큰 돈을 만지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며 “무엇보다 억대가 넘는 고액 연봉자들은 전체 선수 중 극히 일부인 5~10%에 지나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모 프로구단의 2군 선수는 “특히 2군은 방망이가 턱없이 부족한데 만약 선수들이 방망이를 부러뜨리면 1군은 비슷한 금액의 ‘티켓’(구단지원금)이 나오지만 2군은 방망이 값에 절반도 안 되는 티켓을 준다. 나머지 모자라는 돈은 고스란히 개인이 떠안는 수밖에 없다”며 “어떤 선수는 방망이 값이 없어 용품회사에 100~200만원씩 빚을 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구단에 밉보이면 곤란” 벙어리 선수들

구단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연봉협상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상당했다. 상당수 선수들이 구단과 단 1회의 연봉협상을 벌이며 협상 시간도 30분이 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단측이 ‘이 연봉 받을 거 아니면 관두라’는 식으로 일방적 ‘통보’를 해 선수들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모 1군 선수는 “전 시즌 별 볼일 없는 성적을 거둔 선수들에게는 협상과정 없이 다음해 연봉을 통보하는 게 일반적이다”며 “구단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너와 재계약 하는 것도 다행인 줄 알아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견 선수는 “만약 연봉에 불만이 있어도 선수들이 이를 정정할 수 있는 조정신청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구단에 이미지가 나빠지는데다 혹시 곤란한 상황이 되면 삭감 폭이 더 커지기 때문에 대부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경력 7년차인 한 2군 선수는 “꼭 한번 구단과 3번에 걸쳐 연봉협상을 벌인 적이 있는데 결국 처음 제시한 조건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아무리 이의제기를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고 체념하기도 했다.

전 롯데자이언츠 간판타자였던 마해영 엑스포츠 해설위원은 이에 대해 “대부분의 선수가 협상을 길게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번 만나도 구단의 입장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매년 1월 말일까지 협상을 끝내지 못하면 당장 2월부터 연봉이 깎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실 때문에 선수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대리인 제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축구선수들이 구단과의 계약이나 이적 협상에 대신 나서는 전문 에이전트를 고용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대우를 원하는 것이다.

이번 여론조사와 토론회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뤄진 주제는 바로 최근 이슈가 된 프로야구 선수노조 설립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노조 설립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다. 조사에 응한 103명의 선수 가운데 88.2%가 노조 설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71.3%는 자신들이 구단에 고용된 직원이라고 답한 것이다.


“노조 만들면 팀 없앤다” 횡포

이런 가운데 구단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협박에 가까운 횡포가 노조 설립에 큰 걸림돌이라는 증언이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심층면접조사에 응한 한 1군 선수는 “구단이 노조에 참여하는 선수를 방출하겠다는 식의 직접적인 협박은 없었지만 ‘노조가 만들어지면 아예 구단을 없애버리겠다’는 말을 하더라”며 “물론 팀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도록 팬들이 그냥 놔두겠냐마는 선수들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본인이 다칠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선수는 “구단이 드러내놓고 방해하지는 않지만 눈치를 준다”며 “팀장이나 단장급이 선수협 회의에 가지 말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최근 선수노조 설립을 위해 각 팀 대표단 회의를 제안했던 선수협회의 구상이 실패로 끝난 것 역시 구단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란 얘기다.

하지만 프로야구선수가 노동법상에 명시된 근로 장소와 조건, 지시복종 등의 요소에 따라 ‘노동자’로 분류가 가능한 만큼 노조설립의 명분은 충분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마해영 해설위원은 “제도나 연봉 문제로 불이익을 당한 선수 개인이 구단 또는 KBO와 일일이 맞서 직접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수협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무시당하는 게 다반사”라며 “법적으로 일정 지위를 갖고 있는 노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국회 차원의 지원 약속도 나와 귀추가 주목된다. 최문순 의원은 “각 구단들의 노조 설립 방해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며 “전근대적인 프로야구 제도 개선을 위한 입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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