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축구’ 영욕의 9년 월드컵 영광에 잊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0년 남아프리카 희망봉 정복의 시동을 걸었다. 지난 7일 아랍에미리트(UAE)와의 원정경기에서 2:0 낙승을 거둔 대표팀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실히 매듭지었다. 2000년 아시안컵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무릎을 꿇은 뒤 ‘퇴물’ 취급을 받았던 허정무 감독으로서는 9년 만에 쟁취한 성공이다. 불과 수개월 전만해도 답답한 무득점 행진에 ‘허무축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허정무호. ‘맨체스터의 별’ 박지성(28·맨체스터UTD)을 주장으로 받아들인 대표팀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팀 구성을 완성단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와 두둑한 보너스까지 챙긴 대표팀은 ‘원정대회 사상 첫 16강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출사표를 던졌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1년. 남아프리카 희망봉에서 열리는 19회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1차 목표는 16강 진출이다. 아시아 예선 2경기를 남겨두고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한 대표팀은 이미 최고의 성적을 위한 맞춤형 훈련 계획을 완성한 상태다.
랭킹 1위 스페인과 승부 이뤄지나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한·일월드컵 못잖은 ‘드림프로젝트’로 허정무호를 후방지원할 계획이다. 축구협회는 사상 첫 원정대회 16강 달성을 위해 유럽 강호들과의 빅매치를 통한 실전 경기를 줄줄이 예약한 상태다.
대표팀은 오는 8월 12일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위 파라과이를 불러들여 친선경기를 통해 월드컵 본선에 뛸 옥석 가리기에 나선다. 파라과이는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브라질과 골득실에 밀려 2위를 기록했지만 13번의 예선전 가운데 단 1패만을 기록(6승6무1패)했을 만큼 강팀 중의 강팀이다.
파라과이를 상대로 몸을 푼 대표팀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과 가장 흡사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강호 호주와 맞대결을 펼친다. 오는 9월 5일 FIFA랭킹 29위의 호주를 상대로 ‘vs유럽 모의고사’를 치른 대표팀은 10월과 11월 잇달아 아시아 팀을 제외한 최강의 상대와 맞붙을 예정이다.
단연 눈에 띄는 맞수는 오는 11월 펼쳐질 월드컵 유럽예선 1위 팀과의 ‘빅뱅’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즐비한 전통의 강호팀과 ‘맞짱’을 펼칠 예정이다. 허 감독은 최근 “7골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FIFA 랭킹 1위 스페인과 붙고 싶다”고 밝혔었다.
한편 한국은 오는 12월 남아공월드컵 본선 조추첨에서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강팀들과 한 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한·일 월드컵 때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한 이용수 세종대 교수는 “강한 팀들과 붙어 자신감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며 “가능하면 홈경기보다 원정 경기를 갖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운재 ·박지성 보너스 8000만원
1년여의 고된 강행군이 예정된 것보다 앞서, 태극전사들은 달콤한 포상금 휴식에 먼저 젖을 전망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오는 25일 이사회를 열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한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 대한 구체적인 격려금 지원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확한 격려금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6 독일월드컵 수준을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월드컵 개막 전 축구협회는 6회 연속 본선 진출을 일군 대가로 A매치 출전 횟수와 기여도 등을 감안해 격려금 지급 수위를 4단계로 나눴다.
당시 A급은 8000만원, B급 6000만원, C급 4000만원, D급 2000만원 순으로 보너스가 주어진 것. 본프레레 당시 대표팀 감독은 계약조건에 따라 본선 진출 보너스로 1억 5000여 만원을 손에 쥐었었다.
이 같은 사례로 볼 때 남아공월드컵 예선을 위해 총 12번 소집된 주장 박지성과 이근호, 이영표, 이운재 등 핵심 주전은 모두 A급 대우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핌 베어백 감독 사퇴 이후 대표팀을 조련해 온 허정무 감독에게도 본프레레 감독 이상의 금전적 보상이 주어질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감안해 인상폭을 조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월드컵 7회 연속 진출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대표팀에게 적잖은 ‘성의표시’를 보여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 축구협회의 결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허정무 영욕의 1년 6개월
국가대표팀 사령탑 허정무 감독이 편안히 영광을 얻은 것은 아니다. 2007년 아시안컵 축구대회 부진을 이유로 자진 사퇴한 핌 베어백 감독의 뒤를 이어 같은해 12월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허 감독은 불과 수개월 전까지 경질론과 회의론이 불거질 만큼 입지를 넓히지 못했던 것.
그러나 감독 취임 18개월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 확정’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든 허 감독은 후한 재평가를 받게 됐다.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 대회를 끝으로 사퇴해 변방을 맴돌던 허 감독은 7년 만인 지난해 3월이었다.
이미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이 시작된 뒤로 대표팀은 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직후 첫 경기였던 북한에 0:0 무승부를 거두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더구나 대표팀이 한 수 아래로 치부되던 요르단과 2:2 난타전을 벌이자 허 감독을 향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허 감독은 최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당시 평가는 당연했다. 승점 3점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요르단 원정 경기에서 치부가 고스란히 노출됐다”며 당시 경기가 졸전이었음을 자인했다.
이후 최종예선 B조에서 맞수로 떠오른 북한과 첫 경기부터 다시 1:1 무승부를 이뤄 허정무호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북한과의 4연전에서 모조리 무승부를 기록한 허 감독에 대해 축구팬들은 ‘허접무’ ‘무(승부) 재배의 달인’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허 감독이 구사하는 단조로운 전술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허정무 체제로는 남아공행이 어려울 수 있다”는 비관론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허 감독은 지난해 10월 아랍에미리트와의 최종예선 2차전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허 감독은 대표팀 쇄신을 위해 당시 스물일곱 살의 박지성을 대표팀 ‘주장’으로 지목했다. 보통 30대 이상의 팀 고참이 전담하던 주요 보직을 젊은피에게 일임한 파격적인 인선이었다.
이운재 “대표팀 주장은 박지성”
허 감독이 선택한 ‘박지성 주장 카드’는 대성공을 거뒀다. 박지성이 주장을 맡은 뒤 아랍에미리트를 4:1로 대파했고 악몽처럼 따라다니던 ‘사우디 원정 징크스’도 2:0 깔끔한 승리를 거두며 털어낸 것.
박지성은 허정무 감독 이상으로 대표팀의 체면을 세우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허 감독은 지난해 10월 우즈벡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붙박이 주장이었던 김남일(빗셀고베)이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박지성을 차기 주장으로 낙점했다.
박지성은 처음 허 감독의 ‘부름’에 한사코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남일이 여전히 대표팀에 승선해 있는 상태인데다 이영표와 이운재 등 선배들의 존재감이 컸던 까닭이다. 그러나 허 감독의 고집으로 결국 주장완장은 박지성에게 갔고 박지성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대표팀의 맏형인 골키퍼 이운재는 <일요서울>과의 전화통화에서 “나이는 내가 가장 많지만 현재 대표팀의 주장은 (박)지성이다. 지성이가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훌륭히 소화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며 무한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캡틴 박지성의 리더십은 실천하는 카리스마, 부드러운 장악력 등으로 요약된다. 박지성은 주장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솔선수범’을 실천하는 스타일이다. 박지성은 팀 미팅 30분전에 먼저 나와 코칭스태프와 의견을 미리 주고받는다. 관련 사항을 숙지하고 후배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훈련 직후 갖는 선수들 간 미팅에서도 박지성은 짤막하게 할말만 한다. 어린 후배들에게는 박지성의 소통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또 박지성은 부드럽다. 과거 홍명보, 이운재, 김남일 등 전임 주장들이 칼날 같은 카리스마로 선수단 분위기를 이끌었다면 박지성은 막내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긴다. 수다스럽지 않게 자상한 분위기로 후배들의 의견을 조율해 탄탄한 조직력을 이끌어 냈다.
남아공월드컵에 태극기를 휘날릴 기회는 잡았지만 여전히 남은 산은 많다. 부족한 개인기량 만큼 치밀한 조직력이 필요하고 유럽 강호들과 붙어도 부족하지 않은 체력을 만드는 과정도 험난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확실한 목표 앞에 대표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다. 7년 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붉은 영광을 위한 첫 걸음은 이미 시작됐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