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2인자’에서 1인자 등극 마침표

2009년 새해 대한민국 축구를 아우르는 축구협회의 주인이 바뀌었다. 16년 간 장기 집권한 ‘정몽준 시대’가 가고 조중연(63)회장이 새 축구협회장에 등극한 것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의원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조 신임회장의 당선은 사실상 예견된 결과였다.
조 신임회장은 대한민국 정치사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축구계에서 유력한 여권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경쟁자였던 야권의 허승표(63) 축구연구소장을 8표 차로 따돌리고 대권을 잡았지만 조 신임회장이 풀어야할 숙제가 만만찮다.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축구협회 내에서 17년 간 2인자로 군림했던 조 신임회장이 진정한 1인자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중연 신임회장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닉네임은 ‘영원한 2인자’다. 이런 까닭에 조 신임회장을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2인자인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와 견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축구계의 JP’ 조중연
19년에 걸쳐 박정희 정권아래 2인자로 군림한 김 전 총재는 이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상당한 세도를 누렸다. ‘최장수 2인자’인 김 전 총재가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것은 1인자로의 등극뿐이었다. 1인자가 되기에는 정치적 신념과 기반이 부족한 탓이었다.
조 신임회장은 지난 16년 동안 이어졌던 ‘정몽준 시대’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전무이사, 상근 부회장 등 요직을 차례로 거치면서 정몽준 회장 아래에서 축구협회의 살림을 도맡았다.
‘축구행정의 달인’이라는 찬사는 정몽준 회장과 같은 든든한 바람막이가 충분한 지지를 보냈기에 가능했다는 시선도 없지 않다. 때문에 조 신임회장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적이 많다. 1인자를 보호하기 위해 반대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는 궂은일을 자처했고 업무를 추진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잦았다.
조 신임회장은 이를 ‘세컨드 맨의 숙명’이라고 표현했다. 한 체제 안에서 오랫동안 2인자의 자리를 굳혀온 인물이 1인자로 올라서는 일은 흔치 않다. 조 신임회장의 행보에 따라 그의 존재가 빛이 될 수도, 지는 해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텃새 논란 휘말린 ‘여권 황태자’
수많은 축구팬과 축구인들이 조 신임회장에게 바라는 것은 통합과 발전이다. 2002 한일월드컵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면치 못한 국가대표팀의 위상과 클럽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게 관건이다.
“인적 통합, 정책적인 통합을 통해 축구협회가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조 신임대표는 지난달 23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축구협회의 화합을 재차 강조했다. 이번 축구협회장 선거에서 눈에 띈 것은 야권 후보인 허승표 소장의 약진이었다. 총 28명의 대의원들로부터 10표를 얻은 허 소장은 정몽준 회장을 상대로 단 2표만을 얻었던 지난날의 치욕을 크게 씻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지방 대의원들의 표가 대부분 허 소장에게 몰렸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또 5명의 중앙 대의원이 경선 과정에서부터 조 신임회장에게 유리한 멍석을 깔아줬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앙 대의원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질린 지방 대의원들이 일부러 허 소장을 밀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조 신임회장은 “중앙 대의원 제도는 축구협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체육회의 지침을 받아서 하는 문제다”며 “선거에 나오려면 그 제도에 맞춰 선거 운동을 해야 한다. 이건 제도상의 문제지 협회가 텃새를 부린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조 신임회장이 가장 크게 강조하는 것은 ‘포용을 통한 화합, 발전을 향한 변화’다. 그는 “일단 통합을 위해서는 인적 통합을 해야 하고 모든 정책적인 통합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축구협회가 화합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조 신임회장의 취임 일성이 과연 제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이와 관련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명예회장’으로 여전히 축구협회 최상석을 꿰찬 정몽준 전 회장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특히 조 신임회장이 정 전 회장의 소문난 ‘복심’이었다는 점에서 정 전 회장이 협회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단 조 신임회장은 이 같은 우려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었다.
조 신임회장은 “정몽준 전 회장이 한가한 분이 아니다. 사실 정 전 회장께서 16년 간 큰 업적을 남겨 후임으로 부담이 크다. 오히려 국제적인 문제는 협조를 요청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적절한 주식 투자 의혹에 ‘상처’
한편 조 신임회장이 협회장 선거에 출마할 당시부터 축구협회 임원들이 거액의 주식 투자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인 바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조 신임회장이 협회부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이계호 전 실업축구연맹 회장과 부적절한 주식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전 회장은 STC라이프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1000억원대 다단계 사기와 주가조작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물러난 인물이다. 문제는 조 신임회장이 그의 회사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 신임회장은 개인적으로 투자를 했을 뿐이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협회 부회장으로 회장 선거에서 승리한 인물이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조 신임회장은 “개인적으로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을 뿐 특별히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축구팬들은 이 같은 그의 태도에서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을 경질하고 본인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 빈축을 샀던 비굴한 장면이 겹쳐질 뿐이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에서 허승표 소장 등과 함께 조중연 부회장의 ‘대항마’로 나섰던 강성종 경기도축구협회장이 후보직을 사퇴하며 폭로한 중앙 대의원들의 회유, 압력 논란 이면에는 조 신임회장의 실력 행사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무성하다.
논란은 여전하지만 조 신임회장의 축구협회 장악은 이미 시작됐다. 이달 초 사무총장과 전무이사 등 주요 보직을 공개채용할 예정인 ‘조중연 호’의 출항에 축구팬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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