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직 놓고 구단vs문체부 힘겨루기
야구 월드컵이라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를 불과 3개월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야구계가 한바탕 전쟁에 휘말렸다.
지난 12월 16일 신상우 KBO 총재가 야구계 도박사건 파문과 관련해 자진 사퇴한 뒤 프로야구구단 회의에서 후임총재로 추대됐던 유영구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 6일 만에 낙마 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여당 유력 정치인의 압력에 유 이사장이 ‘백기항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프로야구 8개 구단과 KBO 총재 임명권자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당초 KBO 소속 구단들은 지난 12월 23일 이사회를 열고 유 이사장을 차기 총재로 정식 추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문체부 등 정부 여권이 ‘절차상의 문제’를 들며 발끈하며 이 같은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돼버렸다.
일각에서 ‘야구계를 접수하려는 정치권의 음모가 있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박종웅 전 의원이 새로운 총재 후보로 거론돼 논란은 점점 커지고 있다.
KBO가 내세운 ‘자율총재’ 후보가 결국 정치권의 압력으로 낙마했다. 지난달 16일 프로야구 8개 구단 사장단이 차기 총재로 추대한 유영구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 추대 일주일도 채 안돼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겉으로는 유 이사장이 스스로 총재직을 고사한 것이지만 내막은 정치권 실세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했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체육단체장 승인 권한을 쥐고 있는 문체부가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딴죽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또 다른 정치권 후보를 밀기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의혹이 짙다.
“유력한 새 총재 후보 박종웅 전 의원”
KBO 규약은 이사회가 총재를 추대하고 문체부가 이를 승인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사회는 사전에 문체부와 총재 인선에 대한 상의를 한 뒤 추대하는 형식을 취해왔다. 문체부가 꼬집은 ‘절차상의 문제’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유 이사장이 밀려나면서 박종웅 전 의원이 유력한 KBO 새총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정부 여당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입’으로 통하는 권력 핵심 인물로 꼽힌다.
박 전 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지난 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지난 총선 한나라당 부산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박 전 의원은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차기 KBO 총재 후보로 꾸준히 거론돼왔다.
당초 사장단에 의해 차기 총재로 지명된 유 이사장 측은 지난 12월 22일 한 통신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사퇴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유 이사장의 측근은 “유 이사장께서 프로야구는 정부와의 관계도 중요한데 마찰까지 빚으며 할 필요가 있겠느냐, 사장단이 더 좋은 분을 뽑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유 이사장의 뜻을 전했다.
이는 유 이사장의 낙마에 정부부처와의 마찰이 적잖이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기도 해 적잖은 파문이 될 전망이다. 유 이사장이 선임된 뒤 문체부 관계자가 하일성 KBO 사무총장을 만나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강력 반발해고 여권 고위 관계자도 “KBO 총재는 문화부 소관”이라며 김 전 대통령 측 박종웅 전의원을 노골적으로 추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KBO 총재 선임을 놓고 정치권과 사장단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야구인들은 이를 정치권의 ‘프로스포츠 길들이기’ 시도로 보고 있다. 맛깔스러운 해설로 지난 베이징 올림픽 당시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허구연 MBC ESPN 해설위원은 지난 12월 22일 <동아일보>에 개재한 칼럼을 통해 정부 여당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허구연 “정부는 탐욕스런 하이에나”
허 위원은 칼럼에서 정부 여당을 ‘탐욕스런 하이에나’라고 지칭하며 맹비난했다. 그는 “구단들이 추천한 새 총재 후보에 대해 문체부 관계자가 절차상의 문제 등을 두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와 야구팬들과 야구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며 “KBO 정관 어디에도 이사회 소집여부, 추천인사에 대한 사전교감 조항은 없다”고 밝혔다.
정부 여당의 총재 선임 개입이 명백한 ‘월권’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허 위원은 또 “이명박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계속 강조해온 ‘체육계 문제는 체육계 스스로, 체육인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는 인사정책과 상반되는 것이어서 이번 반응은 의아스럽기만 하다”며 “감독의 작전지시를 따르지 않았거나, 사인을 제대로 못 본 선수의 실수 같은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은 원칙 속에 우선 순리대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체육계도 탐욕을 앞세운 무리들이 하이에나처럼 싹쓸이 하려는 시도를 이제 체육계 스스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탐욕스러운 정부 여당에 맞선 체육계의 대응을 공개적으로 주문한 것이다.
이번 사태로 신임 총재를 자율적으로 뽑으려던 이사회의 의도는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10명의 총재를 배출했다. 이 가운데 지난 98년 11대 총재 대행으로 시작해 12~14대 총재를 역임한 박용오 전 두산그룹회장을 제외하면 모두 정치인 출신이다.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야구에 대한 식견과 사업 의지가 충분하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이들 인물 대부분은 임기 중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거나 오히려 야구계에 오명만 남기고 사라진 경우가 많아 KBO 총재직이 정부의 ‘논공행상’에 이용돼 왔다는 불신의 골을 더욱 키우는 요인이 됐다.
유력 정치인들과 여권 세력이 유독 KBO 수장직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몇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정치인이 KBO에 눈독 들이는 이유
KBO 총재는 대외적으로 한국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다. 사회적인 명예와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홍보직인 것이다.
물론 KBO 총재를 단순 명예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KBO 야구 규약 제3조 2항에 따르면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및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 적용된다’고 명시돼 있다. 즉 KBO 총재는 프로야구 회계부터 구단, 선수들의 모든 활동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인 셈이다.
야구계를 쥐고 흔들 실권 뿐 아니라 경제적인 이권도 상당하다. KBO의 1년 예산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4년 정기국정감사 제출 자료에 따르면 연간지출 총액이 180억원에 이른다. 2009년 현재 각종 스폰서 계약 및 방송 중계권료 등이 치솟은 만큼 KBO가 쥐고 있는 돈주머니는 상당히 두둑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총재직에 오르는 순간 3년의 임기를 보장받게 되며 적잖은 연봉과 판공비 등의 부수적인 대우도 따라온다. 전임 신상우 총재의 경우 1억8000만원에 이르는 연봉을 받아왔다. 신 총재는 올해 현대구단 해체와 히어로즈 창단을 겪으면서 KBO 재정에 타격을 입자 지난 2월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40% 삭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총재는 월 1000만원 정도의 판공비와 기사가 달린 에쿠스 승용차를 제공받는다. 무엇보다 KBO 총재는 프로야구 8개 구단을 운영하는 대기업 총수와 나란히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전경련 회장 못잖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고 WBC 무대를 앞두고 있는 현재 국민들의 눈과 귀는 프로야구로 쏠릴 수밖에 없다. 관심에 목마른 정치인에게 KBO 총재는 두말 할 것 없이 훌륭한 대국민 홍보 창구인 셈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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