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위해 팬이 전화 한 것을 로비라니…”

대한빙상연맹(회장 박성인)이 무성의한 일처리 탓에 팬들의 잇따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빙상 스포츠를 책임지고 있는 연맹이 ‘제2의 김연아’로 불리는 김나영(18·인천연수여고)의 국제대회 출전권을 놓고 수수방관한 것도 모자라 중학생 팬을 상대로 ‘법적처리’까지 운운하며 이전투구에 골몰하고 있는 탓이다. 포탈사이트 ‘디시인사이드-피겨스케이팅 겔러리’로 대표되는 빙상 팬들은 “기본적인 일처리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여론 호도에만 신경 쓰는 듯한 연맹에게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겠다”며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김나영의 대회 출전권을 위해 백방으로 힘쓴 중학생 양모(16)군과 ‘프론과새우’라는 닉네임을 쓰는 여대생을 상대로 한 연맹의 대응 방식은 초등학생보다 못하다는 평가다. 선수를 위해 애쓴 이들에게 “빙상 관계자를 사칭한 것에 대해 고소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힌 연맹은 한마디로 ‘자격 미달’이라는 게 팬들의 반응이다.
최근 팬들은 빙상연맹을 ‘엿맹’이라고 부르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빙상연맹과 팬들의 갈등이 불거진 것은 국내 피겨 2인자인 김나영이 팬들의 도움으로 최근 국제대회 출전권을 얻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김나영은 당초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008~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시니어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시리즈 5차대회 ‘컵 오브 러시아(이하 COR)’에 초청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14일 김나영의 팬인 양군(아이디 ★holic)이 COR 출전 예정인 10명의 선수 가운데 2명이 부상으로 기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상황은 급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양군은 이 사실을 빙상연맹에 알리고 김나영의 참가를 위해 힘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연맹은 “규정상 불가능하다. 개최국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그러자 양군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누리꾼들이 대신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상팬들 “정신줄 놓은(?) ‘엿맹’”
평소 팬클럽 회장으로 김나영 선수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양군은 선수의 모친과 코치진을 통해 참가 의사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 뒤 ‘프론과새우’ 등 몇 명의 빙상 팬들이 모여 직접 ISU와 러시아 빙상연맹에 직접 전화와 팩스로 연락을 취했던 것.
그 중 영어실력이 뛰어난 ‘프론과새우’를 중심으로 러시아 측과 이메일 연락을 계속 한 끝에 마침내 신청서만 보내면 대회 초청권을 보내줄 수 있다는 답을 얻어냈다. 문제는 대회 등록일과 출국까지 지나치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
결국 양군은 선수의 대변인을 자처해 불과 1시간 만에 관련 서류를 모두 준비하는 괴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빙상연맹에 전화를 걸어 “우리(김나영) 측에서 비공식 신청서를 이미 보냈으니 빙상연맹의 이름으로 공식 신청서를 러시아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러시아로부터 정식 초대권을 얻은 김나영은 김연아와 함께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두 번째 한국선수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두 손 놓고 있던 빙상연맹 대신 일반 팬이 불과 하루 만에 국제대회 출전권을 따내자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다. 빙상연맹의 무능함과 탁상행정에 대한 비난 여론이 봇물처럼 일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불거지자 빙상연맹은 “그랑프리 시리즈 출전은 대회 조직위와 ISU가 100% 초청 대상을 결정하는 대회”라며 “팬들이 움직이기 전에 이미 김나영의 출전은 확정된 상태”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팬들은 이런 해명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며 발끈하고 나서다. 포탈사이트 ‘디시인사이드-피겨스케이팅 겔러리’에서 활동 중인 ‘태경’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직접 상황을 재구성한 글을 작성해 언론사마다 제보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양군이 빙상연맹에 김나영 선수의 출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무성의한 답변뿐이었다는 것. 더구나 연맹 관계자는 문의 전화를 건 양군에게 욕설까지 했다는 주장도 담겨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누구를 위한 빙상연맹인가?
무엇보다 연맹 관계자가 선수와 피겨에 대한 열정으로 움직인 양군 등을 상대로 “김나영 선수 측 관계자를 사칭한 것에 대해 형사 고발하겠다”는 발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한편 여자 싱글 세계랭킹 37위인 김나영은 COR 대회 출전을 위해 지난 19일 인천공항을 통해 모스크바로 출국했다. 올해 초 4대륙 대회 4위 입상과 세계선수원대회에서 19위를 기록하며 정상급선수로 성장한 김나영은 20일부터 열리는 그랑프리 5차 대회를 통해 날개를 펼 예정이다.
애초 그랑프리 6차 대회인 ‘NHK 트로피’에만 초청을 받았던 김나영은 양군과 팬들의 도움으로 대체 선수로서 출전권을 따내는 행운을 잡았다. 드라마 황진이 OST와 차이코프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배경음으로 무대를 기획한 김나영은 자신의 첫 시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무대인 COR을 앞두고 단단한 각오를 드러냈다.
고질적인 오른쪽 무릎부상 때문에 진통제를 맞아가며 하루 6시간 이상 강행군을 거듭해온 김나영은 자신의 장기인 점프에 승부를 걸 계획이다. 김나영은 출국 전 기자들과 만나 “욕심 부리지 않고 개인 최고 점수를 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팬들의 출전권 획득 ‘로비’ 논란으로까지 번진 김나영의 COR 출전권 획득 사건. 연맹이 스스로 해결했어야 할 일을 도맡아 한 팬들에게 씌운 누명은 씁쓸한 변명일 뿐이라는 게 빙상팬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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