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왕’ 김일 추모대회서 1분 57초 만에 TKO승

‘노장 레슬러’ 이왕표(53)가 2분 만에 만든 ‘오므라이스(상대 ‘밥’샙의 이름을 빗댄 것) 요리’는 짜고 친 고스톱이었을까. 지난 12일 서울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열린 이왕표와 밥샙(34·미국)의 경기를 놓고 진정성에 논란이 일고 있다. 총 20분 3라운드로 치러질 예정이던 경기가 불과 2분 만에 끝나버린 것도 모자라 일부 경기 과정을 분석한 결과 승패가 이미 정해진 워크(Work)경기 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더구나 K-1에서는 이미 한물갔지만 나름 흥행력을 자랑하는 밥샙을 초청한 만큼 적잖은 돈이 한국프로레슬링협회로부터 빠져나갔을 것이란 루머까지 돌고 있다.
“프로레슬링은 나의 꿈이다. 꿈을 갖고 장난칠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호언장담한 노장 레슬러의 투혼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우려에 격투기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실전대결’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관심을 모았던 이왕표와 밥샙의 대결은 결국 짜고 친 고스톱 논란만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지난 12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제2경기장에서 열린 고(故) 김일 추모 프로레슬링 대회 ‘포에버 히어로(Forever Hero) 3’ 대회에서 이왕표는 밥샙에게서 1라운드 1분 57초 만에 암바(관절기 기술)로 TKO승을 따냈다.
초등학생부터 중장년층까지 빽빽하게 들어앉은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 두 사람. 경기의 주도권을 먼저 쥔 것은 아들 뻘의 ‘야수’ 밥샙이었다. 시작 공이 울리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달려든 밥샙은 160kg에 육박하는 덩치를 무기로 큰 펀치를 휘두르며 이왕표를 밀어붙였다.
2분만에 ‘오므라이스’ 만들기
그러나 밥샙의 펀치는 번번이 이왕표의 급소를 피해갔고 1분 30초가 조금 지났을 때 이왕표는 밥샵의 오른팔을 잡아 암바를 시도했다. 태권도식 뒤차기에 이은 그의 공격은 결정적이었다. 밥샵이 끝내 탭아웃을 치자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켰고 이왕표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승리를 과시했다.
본래 종합격투기 룰로 10분과 5분, 5분 3라운드로 진행될 예정이던 경기는 두 사람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전인 1분 57초 만에 끝나버렸다. 노장 레슬러와 스타 파이터의 실전격투를 기대한 팬들 사이에서는 노골적인 야유도 들려왔다.
하지만 이왕표는 경기에서 완벽한 TKO승을 따냈고 밥샙 역시 패배를 인정해 두 사람은 나중에 K-1(입식타격) 방식으로 다시 한번 승부를 가리자는 ‘아름다운 약속’을 하며 굿바이를 외쳤다.
“‘밥’샙을 재료로 ‘오므라이스’를 만들겠다”는 이왕표의 호언장담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실현된 순간이었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했던 게 문제였을까. 1분 57초의 맞대결은 수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끝났다. 일부 누리꾼과 격투기 전문 언론들은 이 같은 의문을 공론화하기도 했다. 이들이 제기한 미심쩍은 부분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격투전문 웹진 ‘엠파이트’에 따르면 종합격투기용 오픈 핑거 글러브를 낀 두 사람은 모두 사타구니 급소를 보호하는 ‘파울컵’을 착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펀치나 킥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의혹이 불거질 만했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분들
또 이왕표를 노리는 밥샙의 펀치는 정확성에서 형편없었다. 대부분 상대의 어깨에 맞거나 빗나간 주먹은 결국 이왕표에게 그라운드 기술을 허용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밥샙을 쓰러트린 상태로 파운딩 공격을 한 이왕표 역시 그의 얼굴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스스로 ‘복싱 기술이 약하다’고 인정한 탓도 있었지만 화끈한 타격전을 기대한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정적인 야유는 이왕표의 태권도식 ‘돌려차기’를 두고 터져 나왔다. 그의 발차기는 밥샙의 복부가 아닌 옆구리에 비스듬히 맞았다. 분명 큰 충격을 줄 만큼의 공격은 아니었지만 뒤로 크게 물러서는 밥샙의 움직임은 과도한 연기의 냄새가 났다.
이 같은 사항들로 정리하면 결국 두 사람이 잘 짜여진 각본 아래서 ‘프로레슬링 스타일’의 워크 게임을 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경기의 심판이다. 주심으로 나선 이는 격투기 심판을 본 경험이 없는 프로레슬링 전문 심판이었고 링 주위에 점수를 채점 할 부심도 없었다. 이미 경기 결과를 채점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현재 국내 프로레슬링이 처한 상황에서 이왕표가 참패를 당하는 것은 자칫 국내 프로레슬링 시장을 회복불가능의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또 50세를 넘긴 노장 레슬러의 도전이라는 면에서 이왕표와 밥샙의 대결은 제법 성공작으로 보인다.
누리꾼 김성인씨는 “MMA(이종격투기)를 가장한 프로레슬링은 다른 나라에서 많이 치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번 경기를 욕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는 마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총 맞으면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따지는 것과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반면 김신영씨는 “MMA룰이라고 해놓고 대놓고 프로레슬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이다”며 “두 사람이 실전대결을 하겠다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해놓고 이런 맥 빠지는 경기를 한 것은 팬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왕표는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여러분, 이왕표가 해냈습니다. 이왕표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에 해냈습니다”는 감격적인 소감을 전했다. 무엇보다 “내년부터는 태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종합격투기 훈련을 쌓겠다”며 두 번째 도전이 머지않았음을 내비쳤다.
전설의 프로레슬러 故 김일 선생을 추모하는 경기는 비록 진정성 논란에 휘말렸지만 한국 프로레슬링을 이끄는 수장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줘야 하는 이유다.
이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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