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시름과 불황 ‘여신’의 날개가 걷어냈다

돌아온 ‘피겨의 계절’ 그랑프리 1차 대회 압도적 1위
‘겨울소녀’의 계절이 왔다. ‘피겨요정’에서 ‘여왕’으로 등극한 김연아(18·군포 수리고)가 2008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시즌의 서막을 여는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193.45점을 기록해 2위와 무려 20점 차 이상을 벌리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불황으로 시름에 젖은 국민들의 마음에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베이징 워터큐브를 수놓은 ‘여름소년’ 박태환의 뒤를 이어 ‘국민 비타민’으로 자리매김한 김연아. 요염하고 치명적인 ‘세헤라자데’로 분한 그녀의 매력을 집중 분석했다.
“김연아! 그녀는 정말 특별하다” 지난달 26일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 컴캐스트 아레나에서 열린 2008~2009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탁월한 경기력으로 우승을 거머쥔 김연아에게 세계 네티즌의 탄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피겨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피겨 팬들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스케이팅이다. 그녀는 정말 특별하다”며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해외 게시판 번역 전문 웹진 ‘개소문닷컴’에 따르면 김연아가 모든 면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했으며 성숙한 여인으로의 변신에 대성공을 거뒀다는 게 미국 팬들의 반응이다.
체면 구긴 미국 “연아, 올림픽선 더 강할 것”
반면 미국 피겨계는 김연아의 활약에 짐짓 씁쓸한 표정이다.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피겨강국’의 위상이 크게 위태로워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악의 경우 시상대에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지난 1964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 이후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미국 선수가 메달을 따지 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열린 이번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는 한국의 김연아가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나가노 유카리(일본), 안도 미키(일본) 등 아시아 선수들이 순위를 휩쓸었다.
반면 미국이 기대주로 내보낸 키미 마이스너(19)는 연기 중 내내 실수를 연발했고 주니어 출신 신예인 레이첼 플렛(15), 미라이 나가수(15)는 4, 5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29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케이트 아메리카’ 대회에서 미국 선수가 시상대 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피겨계에 한숨이 깊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LA타임즈 피겨 전문기자 필립 허쉬는 지난달 28일(한국시간) 기고문을 통해 “지난해 전미 피겨선수권 1, 2위 선수가 참가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에 2010 동계올림픽 결과를 낙관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이런 비관적 견해 뒤에 역시 김연아에 대한 찬사를 빼놓지 않았다. 필립 허쉬 기자는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보여준 김연아의 연기는 2010 동계올림픽에서도 그가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것을 보여줬다”며 “비록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새 시즌 플레이를 보지 못했지만 김연아의 연기는 세계 정상급”이라고 치켜세웠다.
‘박태환에서 김연아로’ 바통터치
죽음의 무도와 세헤라자데로 뇌쇄적인 매력을 선보이며 피겨 본토에 태극기를 꽂은 김연아의 쾌거는 11년 전 IMF의 혹한 속에서 미국 여자프로골프 LPGA 투어 US오픈에서 ‘맨발투혼’을 선보인 박세리의 그것과 닮았다.
매력적인 빨간 드레스 차림의 김연아가 과거 선보이지 않았던 강렬한 연기로 쟁쟁한 정상급 선수들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은 경기 불황과 우울한 뉴스로 얼룩진 국민들의 마음을 적신 ‘붉은 단비’였다.
최근 국내 스포츠계는 박태환과 김연아라는 빅스타가 이끌어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과 겨울의 사이인 가을은 ‘국민 오누이’가 바통 터치를 하는 계절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박태환은 2006년 카타르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자유형 200m와 400m, 1500m 등 3종목을 싹쓸이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자신의 주종목인 400m 금메달과 200m 은메달을 거머쥐며 세계 최고임을 증명한 그는 ‘국민 남동생’으로 국가적인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박태환이 한국 수영 100년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면 김연아는 겨울 스포츠의 꽃 피겨스케이팅에서 100년 만에 움튼 꽃봉오리다. 일부에서는 100년 안에 김연아와 같은 스케이팅 천재를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박태환이 올림픽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빛을 발했듯 국민들의 관심은 ‘겨울소녀’에게 집중되고 있다. 아직 동계 아시안게임과 동계올림픽 등 ‘큰 물’ 경험이 없는 김연아에게 2010 벤쿠버 올림픽은 새로운 도전이자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유독 큰 대회에서 운이 따르지 않는 김연아는 2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해 동메달 2개를 따는데 그친 바 있다. 2006~2007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에 이어 대회 3연패에 도전하고 있는 김연아는 2009년 세계선수권과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2010 벤쿠버 올림픽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박태환이 올림픽 무대를 석권한 만큼 ‘누이동생’ 김연아 역시 국민오누이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투지에 불이 붙었음은 물론이다.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의 현신
부정을 저지른 왕비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세상 모든 여성을 죽이려했던 아라비아 왕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세헤라자데.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긴 가녀린 아라비아 왕녀는 21세기 한국의 소녀 김연아의 몸에서 부활했다.
지난달 27일 프리스케이팅 연기에서 열정적인 붉은 드레스를 완벽하게 소화한 김연아는 손목과 팔의 움직임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공중 연속 3회전)등 고난도 연기를 완벽하게 성공시켰지만 관중들은 찬사를 보내는 순간마저 잊을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다.
약점으로 지적됐던 유연하지 못한 몸놀림을 교정하기 위해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무용수 이블린 하트에게 전수받은 발레 교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또 지난달 27일 새까만 드레스를 휘감은 ‘악녀’로 분한 김연아의 표정 연기 역시 발군이었다. 팬들은 “한층 농염해졌다.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며 그의 진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엇보다 프리스케이팅 연기로 선보인 세헤라자데에 대한 평가는 의상부터 안무, 표정연기까지 완벽에 가까웠다는 평이다. 특히 김연아의 의상은 라이벌들과 비교되면서 순식간에 인터넷 인기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LA타임즈 인터넷판은 ‘죽음의 무도’를 끝낸 김연아에게 “의상이 우아하고 훌륭하며 화려했다. 잘 어울린 적합한 의상이었다”고 치켜세웠다. 반면 3위를 차지한 안도 미키에게는 “할머니 다락에서 찾은 곰팡이 냄새 나는 커튼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게 틀림없다”며 혹평을 날렸다.
압도적인 점수차로 우승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가 관객을 위한 앵콜 무대인 ‘갈라쇼’에서 선보인 곡은 ‘온리 호프’. 불황의 늪에 빠진 국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 김연아의 날갯짓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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