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응원가 들으며 큰 88년생 ‘소녀시대’

20대 초반의 어린 태극낭자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를 비롯한 세계 골프무대를 휩쓸고 있다. 올 시즌 US여자오픈을 제패한 박인비(20)와 오지영(20) 등 1988년생 용띠 동갑내기 뿐 아니라 지은희(22), 이선화(22)등도 우승컵에 입을 맞추며 ‘박세리 키즈(1998년 박세리의 LPGA 우승을 계기로 골프를 시작한 선수들을 일컫는 말)’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에 이른 것. 한국의 ‘골프 아이콘’ 박세리(31)가 1998년 맨발 투혼으로 US여자오픈을 석권하며 IMF 사태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해준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LPGA에서 한국 선수들은 가장 강력한 파워 집단으로 급성장해 현재 무려 48명의 우리 선수들이 미국 무대를 누비고 있다. 이들 가운데 단연 선두로 돋보이는 것은 바로 ‘박세리 키즈’. 겁 없는 소녀들의 경쟁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골프계를 휩쓴 ‘소녀시대’ 돌풍을 집중 해부했다.
1998년 외환위기로 불경기가 한창이던 시절, 머나먼 미국 땅에서 민중가요 ‘상록수’를 배경으로 박세리가 맨발로 물에 들어가 회심의 샷을 날리는 장면은 국민들에게 절망 끝에 목격한 희망과도 같았다.
누가 ‘박세리 키즈’인가
이 감동적인 장면은 막 10살을 넘긴 아이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IMF의 경제적 부담과 별개로 박세리의 흰 발과 양희은의 구슬픈 가락은 수많은 꿈나무에게 ‘골프’라는 스포츠의 환상을 심은 것. 이것이 바로 ‘박세리 키즈’의 시작이다.
지난 6월 미국 메네소타주 에디나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최연수 우승 기록을 세운 박인비는 대표적인 박세리 키즈다. 10년 전 초등학교 4학년이던 박인비는 박세리가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지 이틀 뒤 처음 골프 클럽을 손에 쥐었다.
‘박세리 키즈’는 박인비처럼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두 번의 연장전 끝에 우승한 박세리의 성공신화에 자극을 받고 골프계에 입문한 20대 초반의 여자골퍼들을 뜻한다.
최근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박인비를 비롯해 오지영·김인경·김송희·민나온·이선화·최나연 등이 대표주자다. 지난 6월 웨그먼스 LPGA대회서 우승한 지은희와 브라질 교포 출신 안젤라 박도 최근 ‘박세리 키즈’에 이름을 올렸다. 해외파뿐 아니라 국내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신지애와 박희영·김하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걸출한 스타로 거듭난 박인비·오지영·김인경·신지애·안젤라 박 등은 1988년에 태어난 용띠 동갑내기로 일부 언론에서는 88년생 용띠 골퍼만을 박세리 키즈로 구분 짓는 경우도 있다.
명품레슨+자신감+아버지의 힘
박세리 키즈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탄탄한 개인기다. 어릴 때 골프계에 입문한 이들은 체계적인 명품 레슨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개인기를 연마해왔다. 그 중 박인비와 오지영, 김인경 등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회 우승을 다투며 서로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은 것은 물론 폭 넓은 교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골프수업에 매진한 이들은 낯선 외국 생활에도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다. 해외 투어에 대한 풍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미국진출 첫해부터 안정적으로 연착륙에 성공하는 것 또한 ‘박세리 키즈’의 남다른 경쟁력으로 꼽힌다.
최근 돋보이는 후배들에게 있어 우상에서 경쟁자로 위치가 바뀐 박세리의 입장은 어떨까. 박세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후배에 대한 부러움 섞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요즘 한국에서 온 선수들은 예전과 정말 많이 다르다. 뛰어난 기량은 물론이고 쉽게 미국생활에 적응한다”며 “그런 모습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우리들이 없던 길을 만들어 냈다면 이들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그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 말했다.
박세리 키즈를 만든 또 하나의 위력은 바로 ‘골프대디(Golf-Daddy)’의 힘이다. 라운드 내내 그림자처럼 선수들을 따라다니며 세세한 지도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들의 ‘바짓바람’이 세계적 골프 스타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는 박세리의 아버지이자 원조 ‘골프대디’로 꼽히는 박준철씨의 활약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박씨가 딸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한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연습을 시킨 것은 스포츠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박씨는 딸 박세리가 전담 코치의 지도를 받게 된 이후에도 세세한 부분은 직접 코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천재 미셸 위 역시 부친 위병욱씨의 철저한 훈육 아래 세계적 선수로 거듭난 경우다. 전담 캐디를 쓰다 대회 출전 도중 아버지에게 다시 캐디를 맡긴 것도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부친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만큼 선수들의 기량은 물론 기초적인 체력 관리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힘이 오늘날의 ‘박세리 키즈’를 성장시킨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 끝에 살아남았다는 것 역시 ‘박세리 키즈’의 성공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다. 특히 신지애와 김인경·김송희·민나온 등 88년생 용띠 소녀들은 2005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히기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실력을 다져왔다.
살인적 경쟁률 뚫고 살아남아
김인경의 부친 김철진 씨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00:1에 육박하는 뜨거운 싸움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한 바 있다.
김씨는 “다른 해에 태어난 선수들은 중간에 골프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88년 용띠 선수들은 낙오자가 거의 없다. 치열한 경쟁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주니어 대회가 한번 열리면 1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한자리에서 실력을 겨룬다. 올해 중고연맹 대회에는 1250명의 선수가 출전해 뜨거운 골프 열기를 선보였다. 이런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은 해외무대에서 100여명과 우승을 다투는 일쯤은 어렵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수백, 수천의 갤러리가 모여들어도 기죽지 않는 것은 ‘박세리 키즈’의 남다른 면이다.
그렇다면 LPGA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은 ‘박세리 키즈’ 가운데 최강의 후계자는 누구일까. 부문별로 살펴보면 드라이버 샷은 이지영을 따라올 자가 없고 퍼팅능력은 박인비가 가장 돋보인다. 아이언 샷은 최나연이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부문별 최강자는 있지만 이들을 모두 아우를 절대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10년 전 박세리의 활약에 영감을 얻어 골프계에 뛰어들었지만 각각의 장점이 선수 개개인의 색깔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박세리 키즈’의 등장은 더 이상 10년 전 박세리의 복제품이 아니다. 뛰어난 실력과 개성으로 무장한 이들의 활약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
로 보인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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