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후 사냥개 잡아먹는다”
정치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자성어 중 하나가 토사구팽이다. 권력을 잡기위해 철저하게 이용만당하고 권력을 취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비정한 세계가 정치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정치권에 회자된 것은 김재순 전 국회의장 때문이다. 1992년 대선에서 YS 정권 탄생 주역이었던 김 전 의장이 공직자 재산공개과정에서 국회의원 사퇴와 정계를 떠나면서 YS와 민주계를 겨냥해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써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토사구팽’보다는 ‘견강부회’(억지로 말을 만들어 자기의 조건에 맞도록 한다)라는 지적이 많다. 토사구팽당한 대표적인 정치인은 충청권 출신의 김종필 전 총재(이하 JP), 이인제 의원(이하 IJ)이라는 데 정치권은 토를 달지 않는다. JP의 경우 1990년 YS와 함께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YS는 여당의 대권 후보를 꿈꾸고 있었고 JP는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배를 탔다. 이로인해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다. YS는 1987년 대선때보다 충남에서 20%P, 충북에서 10%P 더 얻어 당선됐다. 이때부터 충청권이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JP는 3당 합당 대열에 동참해 92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YS가 집권 3년차에 들어서자 JP 대표 축출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YS 역시 1995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런 소문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YS와 JP는 집권 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내각제 개헌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1995년 YS와 민주계의 퇴진 압력으로 민자당을 탈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JP는 1996년 총선에서 50석을 확보해 제2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물론 YS가 이끄는 신한국당은 과반의석에 못미치는 139석을 얻고 DJ의 국민회의는 79석을 얻었다.
1997년 대선에서 YS에 배신당한 JP는 DJP 연대를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뤄낸다. DJP 연합은 대선에서 충청표 상당수를 끌어와 대권 4수생인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게 됨은 물론이다. 국민의 정부는 집권초 JP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자민련 몫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JP와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DJP 연합 핵심 사안인 내각제 개헌을 지키지 않으면서 둘 사이 역시 결별을 맞이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가 자신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자 JP는 “DJ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97년 11월 3일 DJP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이후 3년도 안돼 공동여당 포기선언을 했다. JP는 대통령이 된 YS, DJ 모두로부터 정치적으로 배신을 당한 셈이다. 급기야 JP는 2004년 탄핵 열풍속에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JP는 1995년 YS와 사이가 벌어져 민자당 탈당을 결심할 무렵에 “토사구팽”이라는 말로 김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인제 의원의 경우도 정치 인생의 굴곡이 심한편이다. DJ와 정치적 인연은 2000년 임기 3년차를 맞이해 차기 대권 인재풀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노태우 충복이었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인제 최고위원, 노무현 전 의원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중용했다. 특히 DJ는 차기 후계자를 국민참여경선으로 선출하면서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당시 이인제 후보는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에 반발해 경선에 불복하고 대선에 참석해 300만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데 일조한 바 있었다. 당연히 DJ는 권노갑 고문을 통해 이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적극 지지했다. 당시 경선에 참석한 한화갑 후보는 “제주도 경선에서 1등을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마이너스였다”며 “동교동은 나를 안도왔고 이인제를 도왔다”고 증언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선과정에서 김근태 후보가 정치자금 수수 공개를 통해 권노갑 고문의 리모컨을 고장나게 하고 동교동계 구파의 정권 재창출 계획을 사전에 무산시켜 버렸다. 김 후보는 당시 ‘권 고문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고백하면서 권 고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어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1위로 앞서나가고 광주경선에서 김근태 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자 노무현 후보는 1위로 치고 나오면서 ‘이인제 대세론’은 급격히 사라졌다. 특히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한 자릿수 지지도를 가졌던 노 후보가 돌풍을 일으킨 배경으로 노사모 회원들이 존재했지만 DJ 가신 그룹인 동교동계와 연청 사조직이 합작해 만든 극적인 반전이었다.
민주당 경선전까지 ‘이인제 대세론’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았지만 DJ는 또 다른 필승 카드인 노무현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이 후보를 들러리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당시 경선 참여자들 역시 ‘이인제가 없었으면 노무현도 없었다’고 평할 정도로 이 후보는 노 후보가 흥행 몰이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제공한 셈이 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인제 의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며 DJ를 직접 겨냥해 음모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충남 경선을 앞두고 이 후보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노무현 후보가 주장하는 정계 개편과 노풍의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박지원 청와대 정책특보, 임동원 외교안보통일 특보,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장관”이라며 실명을 거론, 청와대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오히려 마산 경선을 앞두고 청와대 한 축을 담당하던 김중권 영남 후보가 전격사퇴를 선언하면서 같은 영남 후보였던 노무현 후보에게 표 쏠림현상이 예상되자 이 후보는 ‘경선 불참 선언’까지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경기도 경선을 앞두고 불참을 선언한 이 후보는 노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조커 활동을 하고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경선 불복자’라는 낙인에 이어 DJ로부터 ‘토사구팽’ 당한 전형적인 인사라는 오명까지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pot.co.kr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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