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도핑테스트에 한국 야구 자존심 짓밟혔다”

지난 시즌 프로야구 최우수선수상(MVP)과 골든글러브를 휩쓴 ‘코리안 드림‘의 상징 다니엘 리오스(36·전 두산베어스)가 지난달 28일 금지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소속팀 야쿠르트(일본)에서 퇴출당했다. 문제는 한국에서 괴력에 가까운 투구력을 선보였던 리오스의 대활약이 약물의 힘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전 소속팀 두산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리오스가 “한국에서 소변과 혈액 검사를 받은 적 있다”며 한국에서 약물테스트에 응했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해 사건은 리오스와 한국 야구계의 진실게임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리오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약물 복용 의혹을 받고 있는 선수를 허술하게 관리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자칫 큰 망신을 당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일본야구기구(NPB)는 지난달 28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리오스의 도핑테스트 결과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과 함께 내년 6월27일까지 1년간 출전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소속팀 야쿠르트는 곧장 “센트럴리그 사무국에 리오스와의 계약해제를 신청했다”며 사실상 해고를 통보했다.
리오스-KBO ‘양치기 소년’은 누구?
리오스는 1년간 출전정지의 중징계뿐 아니라 소속구단에서도 쫓겨나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5월21일 세이부전 뒤 다른 3명의 선수와 함께 도핑테스트를 받은 리오스의 소변에서 단백질 동화제로 금지약물로 분류된 하이드록시스타노조롤이 나왔다. 이 약물은 근육강화제의 일종인 합성 스테로이드로 드러났다. 스테로이드는 스포츠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금지약물 중 하나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NPB는 야쿠르트 구단에 이를 통보했고 구단은 리오스에게 금지약물인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는지 추궁했다. 리오스는 처음 ‘금지 약물은 주사한 적 없다’고 발을 빼다 “지난해 11~12월 미국에서 허리 통증을 치료할 때 의사의 권유로 해당 약물을 처방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지난달 28일 구단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리오스는 “지난해 말 허리통증 치료주사와 영양보조제를 복용하는 과정에서 금지약물이 들어갔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약물을 복용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단순한 실수라는 해명이었다.
그는 또 “당시 약을 처방한 의사가 금지약물이긴 하지만 몸 밖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해 그 말을 믿은 것 뿐”이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일본 야구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세가와 가즈오 NPB 사무국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난해 12월 마지막 치료를 받은 뒤 지금에서야 약물이 나왔다는 리오스의 주장은 상식이하”라고 못 박은 것. 대부분의 금지약물은 복용한지 6개월이면 몸 밖으로 모두 빠져나가는 것이 정설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리오스의 변명은 이어졌다. 그는 “두산 소속 시절에도 소변과 혈액을 따로 제출한 적이 있다”며 한국에서 약물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이는 한국이 놓친 약물 복용 의혹의 전모를 일본 야구계가 밝혀낸 것으로도 볼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크다.
KBO와 두산이 ‘리오스는 한국에서 약물 테스트를 받은 적이 없다’며 곧장 발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KBO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반도핑위원회를 구성해 첫 약물 검사를 실시했고 지난 5월에 두 번째 검사를 했다. 두 차례 모두 8개 구단별로 3명씩을 무작위 선택, 24명의 선수가 도핑 테스트를 받았고 이들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리오스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실시한 지난해 9월 검사에서 그는 도핑 테스트 대상자에 선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BO관계자는 “무작위로 팀에서 3명씩을 뽑아 약물 검사를 했는데 리오스는 검사 대상자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해 도핑 검사 때는 소변 검사만 했을 뿐 혈액은 따로 채취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리오스의 전 소속팀인 두산 역시 자체적인 약물 검사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인 선수들의 경우 매년 시즌 개막 전 취업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혈액을 채취해 에이즈 검사를 한다. 하지만 구단이 따로 약물 검사를 위해 혈액과 소변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 두산 측 설명이다.
“지난해 약물 복용 소문 파다”
논란이 커지자 리오스는 ‘소변 등을 제출 받은 의도가 약물 테스트를 위해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국내 도핑 테스트의 허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듯 하다. 약물 복용 의혹이 불거진 선수를 빼놓고 검사할 만큼 검사 자체가 허술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는 까닭이다.
리오스는 국내에서도 약물 복용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던 선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걸출한 기록을 줄줄이 세웠기 때문이다. 리오스는 한국에서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낸 것은 물론 90승 59패 평균자책점 3.01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특히 작년에는 22승 5패 평균자책점 2.07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함께 정규리그 MVP를 휩쓸었다. 35세의 노장 투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피칭을 선보인 그는 2004년부터 4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괴력으로 유명했다.
지난 시즌 두산과 한국시리즈에서 신경전을 벌인 김성근 SK 감독이 “저건 인간이 아니다”며 리오스의 투구력에 의구심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말 이미 일본 야구계에 리오스가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와 의혹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모 일간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올림픽 예선 당시 한 일본 야구계 인사가 “리오스는 일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리오스가 금지 약물을 복용한 채 한국에서 활동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밝힌 이유였다.
그 후 한국 최고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리오스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요미우리와 오릭스 등 일본 전통의 강호들은 일찌감치 발을 뺐다. 당장 투수진 운용이 어려운 야쿠르트가 뒤늦게 영입에 뛰어든 끝에 리오스의 일본행은 성사됐지만 ‘에이스’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올 시즌 리오스는 2승7패, 방어율 5.46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2군으로 강등된 터였다. 때문에 국내 야구관계자들 사이에선 일본 진출 뒤 조바심에 빠진 리오스가 충동적으로 약물에 손을 댔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두산의 김태룡 운영홍보부장은 “올해 일본에 가서 워낙 안 풀리니 답답해서 (약물의) 유혹에 넘어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구단 관계자 역시 “나이가 들면서 어깨 통증을 견디지 못해 약물을 복용한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야구계를 주름잡은 리오스의 괴력이 약물의 힘이라는 것을 증명할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KBO는 리오스의 한국 성적과 MVP 수상 기록 등을 백지화 하거나 재평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일성 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리오스가 한국에서 얻은 성적이나 타이틀에 대해 KBO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어렵다”며 “한국에서 활약하던 시절부터 약물을 썼다는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나서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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