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인터뷰 김시석 인천유나이티드 수석코치
리얼 인터뷰 김시석 인천유나이티드 수석코치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8-06-27 08:59
  • 승인 2008.06.27 08:59
  • 호수 739
  • 5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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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회사원부터 시작한 ‘축구판 인생극장’

차가운 동토의 바람과 궂은 날씨에 시달리면서도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남자가 있다. 프로축구팀 인천유나이티드 수석코치 김시석(45). 지난 2월 11일 인천 구단의 배려로 스코틀랜드 명문 클럽 셀틱FC로 1년간 축구유학을 떠났던 그가 시즌을 마친 뒤 잠시 한국을 찾았다. 감독도 아닌 코치에게 6개월 이상 해외 유학 기회를 주는 곳은 인천이 유일하다. 실업축구팀 할렐루야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신동아화재 보상팀 일반 직원으로 근무한 김 코치는 우수사원상을 휩쓸 만큼 능력 있는 사회인이었다. 그런 그가 2년 만에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판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천수, 김정우 등 국가대표를 줄줄이 배출한 A급 지도자인 그가 전하는 축구판 인생극장을 들여다봤다.

30분이나 일찍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 기자를 맞아준 김시석 코치는 한국을 떠나기 전보다 야윈 듯 했다. 대한축구협회(KFA)에서 주최한 AFC A급 지도자 교육 일정 차 귀국한 그에게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소감부터 들어봤다.


나 홀로 스코틀랜드 유학

“사실 프리시즌을 이용해 브라질로 떠날 생각이었죠. 유럽 뿐 아니라 남미 축구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어서였습니다. 견문을 넓히지 못한 건 아쉽지만 김정남(울산), 조광래(경남), 박항서(전남) 감독 등 프로팀을 이끄는 축구계 인사들과 공부 핑계로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한국 축구 정보에도 상당히 밝아지더군요. 역시 돌아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 2월 11일 1년 일정으로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인 셀틱FC로 유학을 떠났다. 지난해 인천대교 공사와 관련해 셀틱 관계자가 안상수 인천시장을 만났던 게 인연이 됐다.

셀틱은 1988년 스코틀랜드 항구도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팀 중 하나다. 1967년 인터밀란을 2-1로 누르고 우승, 북유럽 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차지했고 리그 우승컵에 무려 42번이나 입을 맞춘 명문팀이다.

꿈에 그리던 축구 유학이었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객지 생활을 하려니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던 것.

“부인 없이 혼자 생활 하려니 먹는 것부터 쉽지가 않더군요. 아침엔 거의 시리얼이나 빵으로 배를 채우고 점심 한 끼만 셀틱 구단에서 제공하는 식당 밥으로 최대한 포식을 합니다. 저녁은 차로 20~30분 걸리는 중국마트에서 재료를 사다 직접 해먹거나 가벼운 간식으로 때우죠.”

현지 물가가 워낙 비싸 한국식으로 밥상을 차리는 건 상상도 못했다. 어쩌다 시내에서 짬뽕 한 그릇을 먹었는데 팁까지 계산하니 근 2만원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된장찌개 1인분도 1만8천원에 달해 김 코치는 외식할 생각 자체를 일찌감치 접었다.

김 코치에게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느낀 외로움과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훈련 일정을 소화하고 일정을 마무리 하는 시간이 밤 9시쯤. 유난히 해가 길어진 봄부터는 푹 잠드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1, 2군 선수들 훈련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3~4시 정도인데 유소년팀 훈련이 잡힌 날 까지 하면 거의 9시면 하루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죠. 혼자 빈집에 돌아와 밤을 보낸다는 게 참 어렵습디다. 잠들기 전까지 낮에 찍은 훈련 비디오나 축구중계를 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요즘 해가 길어지고부터 밤 11시까지 밖이 환해 밤잠을 설치는 게 새로운 고민거리입니다.”(웃음)


셀틱FC ‘행운의 마스코트’

그러나 맨몸으로 부딪쳐 선수단의 마음을 움직인 김 코치는 4개월 만에 신세계나 다름없는 유럽 무대의 기록자로 변신했다. 셀틱 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 명문 클럽은 현지 언론 출입조차 제한하는 일종의 ‘성역’이다. 클럽하우스와 훈련장을 자유롭게 드나든 외부인은 셀틱FC 역사상 김 코치가 최초일 정도다.

“직접 훈련을 지휘하거나 코칭스테프의 입장에서 선수들을 대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벽이 높기로 유명한 유럽 축구 클럽에서 외부인, 그것도 동양인을 팀의 일원으로 받아줬다는 점입니다.”

김 코치가 이곳에서 익힌 것은 두 가지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창의적인 플레이가 그것이다.

“먼저 선수와 코칭스테프 사이가 굉장히 격의 없습니다. 셀틱에서 뛰고 있는 한 네덜란드 출신 선수는 훈련 중에도 대놓고 장난(?)이 심한데 감독 이하 코치들이 단 한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나중에 감독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프로 선수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면 그 만큼 반감이 생길 수 있다’며 고개를 가로 젓더군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고 용병술을 구사하는 것이 유럽 특유의 ‘창의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듯 합니다.”

그는 지난 4월 27일 벌어진 라이벌 레인저스와의 홈경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경기를 계기로 셀틱은 리그 우승의 승기를 잡았고 김 코치 역시 팀의 일원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사실 김 코치가 셀틱에 발을 들일 당시 팀 성적이 나빠 분위기가 좋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종교전쟁으로 비유되는 양팀의 라이벌전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극적으로 후반전 루즈타임에 결승골을 넣으며 셀틱의 승리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셀틱에 건너왔을 때 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감독 경질론으로 한동안 시끄러웠을 정도니 무거운 분위기에 몸 사리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막상 우승컵을 차지하고 보니 제가 팀에 있어 ‘행운의 마스코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습니다.” (웃음)

한편 김 코치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신동아화재에서 일반 회사원 생활을 경험하고 부평동중을 시작으로 고교축구, 대학축구, 실업축구 무대를 두루 거친 유일한 지도자다. 2년의 회사생활이 김 코치에게 남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할렐루야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곧장 코치로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출신 아내는 운동만 알던 남편이 덜컥 지도자로 나서는 게 걱정스러웠는지 말리더군요. ‘사회경험이 전혀 없으니 얼마간 세상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며 절 설득했죠. 결국 ‘딱 2년만 참자’하고 모기업이던 신동아 화재에 입사했습니다. 보상팀 일반사원이었죠. 그때 우수사원 표창까지 받을 만큼 적응을 잘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2년째 되던 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어린 선수들을 키우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죠.”


보험사 직원에서 프로팀 지도자까지

그는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와 부평동중 감독을 시작으로 꿈에 그리던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기대주가 다름 아닌 이천수다.

“당시 부평동중에서 가르친 선수들 중 대표선수 출신이 몇 명 더 있습니다. 김정우(성남), 박용호(서울), 조용형(제주) 등도 다 제자들이죠. 특히 이천수는 제가 처음 부평동중 지휘봉을 잡았을 때 신입생이었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정말 투지하나는 타고난 선수였죠.”

최근 발목 부상과 연인과의 결별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옛 제자는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김 코치는 제자를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천수가 낮선 네덜란드에서 고생을 많이 한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서두르지 말라’는 겁니다. 스스로 완벽주의에 시달리다보면 더 큰 것을 잃게 되죠.”

김 코치는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현재 호주 대표팀을 지휘하고 있는 핌 베어벡 전 대표팀 감독도 만났다. 베어벡 감독 역시 이천수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사실 천수가 연예인들과 만남이 잦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천수는 영리한 선수지만 스스로의 생활을 제어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죠. 지금은 그저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려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무명 선수 출신으로 호화군단 첼시를 이끈 조세 무리뉴 감독을 닮고 싶다는 김시석 코치. ‘지도자는 외로움과 싸우는 장수’와 같다며 스스로 새로운 전쟁터에 뛰어든 그는 분명 한국 축구의 작은 영웅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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