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소신 무너트린 사령탑의 ‘갈지자 행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촛불 시위를 연상시키는 비난 여론이 축구계를 강타하고 있다.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달 31일 요르단과의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을 졸전 끝에 무승부로 마무리 지은 뒤 ‘룸살롱 파문’으로 징계중인 골키퍼 이운재(35·수원삼성)의 조기 사면을 요청할 뜻을 노골적으로 비치자 축구팬들의 민심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이운재는 지난해 7월 아시안컵 대회 도중 이동국, 김상식, 우성용 등과 함께 숙소를 무단이탈해 술을 마신 사실이 드러나 그해 11월 대표선수 자격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은바 있다. ‘대표선수는 모범이 되고 그라운드에서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소신을 대표팀 사령탑 취임식에서 밝힌 허 감독은 징계중인 이운재의 특별 사면을 언급해 자신이 강조한 원칙과 신념을 스스로 흔든 꼴이 됐다. 허 감독에 대한 축구팬들의 불신은 대표팀 감독 자질 논란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로 시작, 정부의 총체적 부실이 드러나며 반정부 시위로 퍼진 촛불집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일부 팬들은 “치사한 말 바꾸기와 무소신을 여지없이 드러낸 허 감독은 2MB(이명박) 정부와 판박이”라며 격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징계 중이지만 때가 되면 (조기 사면을) 건의할 생각이다(5월31일)” → “협회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계속 얘기 중이다(6월1일)” → “이운재 본인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6월2일)” → “사면을 요청한 적도 없고 고려 대상도 아니다(6월3일)”
허정무 표 ‘허무개그’
이운재 사면과 대표팀 복귀설은 허 감독과 언론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사흘 만에 ‘없던 일’이 됐다.
허 감독은 지난 3일 요르단으로 출국하기 전 가진 마지막 훈련 직후 “(이운재 사면에 대한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는)말도 안 된다.
이운재의 사면을 요청한 적도 없고 고려대상도 아니다. 징계 중인 선수 사면을 감독 권한 만으로 요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31일 요르단전 이후 언론을 통해 드러낸 속내를 180도 뒤집은 것이다.
허 감독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운재의 사면을 요청한 게 아니라 그가 대표팀에서 다시 뛸 수 있는지 몸 상태와 기량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언론이 지나치게 앞서나간 게 문제”라며 자신의 발언을 기사화한 일부 언론에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허 감독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것은 그날 오전 “이운재에 대한 공식적인 사면 요청이 있었다”는 유영철 대한축구협회 홍보국장의 말이 모 일간지를 통해 보도된 직후다. 사면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던 하루 전만해도 “이운재 합류는 그 동안 쭉 검토됐던 일”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던 허 감독이었기에 그의 태도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선수들 배신감 느껴”
문제는 이운재 사면 공식 요청 여부를 둘러싼 허 감독과 협회의 상반된 주장이다.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을 뿐 공식 요청은 없었다”는 허 감독 주장과 “요르단전 직후 이운재 사면에 대한 공식 요청이 있었지만 3일 아침 허 감독이 요청을 철회했다”는 유 국장의 인터뷰가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다.
유 국장이 “김용대를 비롯한 세 명의 골키퍼가 컨디션 난조를 보여 절박한 마음에 의견을 나눴던 것”이라며 해명 인터뷰를 자처했지만 허 감독과 협회 관계자 중 누군가가 ‘언론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다.
허 감독을 둘러싼 불신이 자질론까지 번진 것은 졸지에 ‘못 믿을 녀석’으로 낙인찍힌 선수들의 동요 때문이다. 원정 2연전을 앞두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하는 만큼 선수단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곧장 졸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특히 김용대, 김영광, 정성룡 등 ‘이운재 쇼크’를 직격타로 맞은 골키퍼들은 김현태 골키퍼 코치와 특별 면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코치는 이 자리에서 ‘이운재가 대표팀에 합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선수들을 달랬다.
그러나 ‘사면 파문’으로 불거진 대표팀 내 불안기류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K리그 프로팀 소속으로 대표팀에 합류한 모 선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쉽게 말할 입장이 아니다”며 몸을 사리면서도 “팀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사실이다. 감독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있는 선수들을 못 믿는다는 증거 아니냐. 선수들로서는 일종의 배신감과 불안을 느낄 만하다”고 말했다.
지난 요르단전 선발로 나선 김용대 역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음을 드러냈다. 그는 출국 전 기자들과 만나 “감독님이 운재형을 언급한 것은 그 만큼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자책했다. 요르단전 두 골을 실점한 뒤 뜬눈으로 밤을 새울 만큼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김용대는 “현재 대표팀 골키퍼 맏형인 만큼 감독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대표팀 막내 수문장 정성룡의 말은 좀 더 노골적이다. 그는 “운재형과 비교했을 때 내가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이다. 경험은 이렇게 경기를 치르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치 앞 승리에 집착해 선수들 기를 죽인 허 감독의 가벼운 언행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용기 있는 한마디다.
“정말 상처 받은 건 이운재”
지난해 7월 아시안컵 도중 ‘룸살롱 파문’을 일으켜 그해 11월부터 대표팀 자격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은 이운재는 올 시즌 K리그 정규리그와 컵대회 16경기에 출전, 9골만을 내주며 경기당 0.46 실점의 ‘철벽 방어’를 펼치고 있다.
2002 월드컵 당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기량을 뽐내는 만큼 허 감독이 그를 욕심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운재 본인은 “대표팀 합류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해 본적도 없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리그 휴식기지만 소속팀 훈련을 통해 감각을 다듬고 있는 이운재는 대표팀 사면 복귀설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는 “지금은 잘못을 뉘우치고 소속팀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대표팀 복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고 시기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주위에선 허 감독이 경솔하게 내 뱉은 말로 정말 상처 받은 사람은 이운재라는 걱정도 적지 않다.
수원 팀 관계자는 “(이운재가)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모두 지난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다. 조용히 자숙하고 있는 선수를 들먹여 원하지 않는 여론에 휘말리게 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7일 요르단과 월드컵 예선 3차전을 치른 대표팀은 14일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원정 2차전을 갖는다. 오는 22일 북한과의 최종전까지 소화해야 하는 만큼 이번 3연전은 대표팀의 정신력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가벼운 처신으로 구설수에 오른 허정무 감독이 성난 축구민심을 되돌릴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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