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선무당’ 북한 돌발행동 점입가경

‘축구판 선무당’ 북한의 생떼가 도를 넘고 있다. 북한이 다음달 22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2010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남북전을 ‘제3 중립국’에서 치르기 위해 물밑 작업에 돌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미 지난 3월 치러진 2차 예선도 우여곡절 끝에 북한 요구로 중국 상하이서 개최된 바 있다.
무엇보다 이번 3차 예선은 한국이 홈팀의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요구는 ‘억지’에 가깝다. 북한은 지난 3월 홈팀 권한을 앞세워 태극기·애국가·붉은악마 응원단 모두를 금지하고 경기 공인구까지 바꾸는 등 횡포를 부렸다. 여기에 원정 경기까지 ‘입맛대로’ 하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축구팬은 물론 잠잠하던 대한축구협회까지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2차 남북전을 서울에서 열기로 한 원칙은 절대적이다. 만약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 몰수패로 다스릴 것”이라며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북한이 FIFA 규정까지 무시해가며 한국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는 이유가 뭘까. 억지 생떼로 일관하는 북한의 노림수를 들여다봤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지난 6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손광호 북한축구협회 부위원장이 하루 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연맹 사무국을 방문, 모하메드 빈 함맘 AFC 회장을 만났다고 전했다.
손 부위원장의 방문 이유는 표면적으로 함맘 회장의 59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AFC 발전을 기원한다”는 최남균 북한축구협회장의 친필 서신도 전달했다.
북한, 연맹 수뇌부 접촉
하지만 이 같은 북한측 인사의 협회 방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개별 국가 축구계 고위 관계자가 중요경기를 한 달여 앞두고 협회 수뇌부와 직접 접촉한 것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AFC가 “손 부위원장이 함만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달 22일 열리는 남북 2차전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북한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두 번째 남북전을 앞둔 북한의 속내는 곧 드러났다. 손 부위원장은 방문은 한국이 홈인 2차 남북전을 제3국에서 개최하기 위해 협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지난 6일 회견을 통해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북한이 서울경기를 제3국에서 개최하자는 주장을 펴는 움직임이 감지됐다”고 밝혔다. 조 부회장은 “우리 홈경기인 2차전 서울 개최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북한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통보받지 못했지만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운 상태다.
유영철 대한축구협회 홍보국장은 “홈경기를 개최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FIFA 기준과 규정에 맞게 경기를 준비하고 치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서울에 오든, 안 오든 북한대표팀의 자유다. 하지만 결과에 대해선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월드컵 예선은 AFC가 아닌 FIFA가 관장하는 만큼 북한이 함만 회장을 만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실제 개최지가 바뀔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 대한축구협회의 설명이다. 특히 FIFA 규정 중 ‘정해진 경기에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출전하지 않을 경우 0-3 몰수패를 준다’는 항목을 들어 북한을 압박할 예정이다.
북한이 지난 3월 평양 남북대결을 무산시킨 데는 북한 땅에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정치적 논리가 강했다. ‘홈&어웨이’라는 기본 축구논리를 정치색에 맞춰 퇴색시킨 것이다.
“안 오면 0-3 몰수패”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북한은 ‘1차전을 원정경기나 다름없는 제3국에서 치렀으니 2차전 역시 그래야 한다’는 일방적 형평성을 앞세우고 있다. 손 부위원장은 함맘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 3월 “서울 남북대결 때는 국제축구연맹(FIFA) 원칙에 따라 북한 국기와 국가를 허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북한의 ‘상식’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남측이 서울 남북대결에서 국가정통성의 상징인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제3국과 똑같이 배려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북한은 요지부동이다.
북한이 양보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조2위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원정경기의 부담감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현재 1승1무(승점 4)로 조 2위를 달리고 있는 북한은 조 3위인 요르단(승점3)에 바짝 쫓기고 있다. 골득실 역시 북한(+1)과 요르단(+1)이 같다. 조2위까지 주어지는 최종예선 진출권의 향방이 단 한경기로 뒤집힐 수 있는 만큼 북한은 필사적이다. 여기에 44년 만에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진 이상 정치논리와 축구논리를 모두 동원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다.
유리한 상황 만들려 혈안
먼 거리를 이동하는 선수들의 피로누적도 북한의 걱정거리다. 다음달 2일 투르크메니스탄 원정을 시작으로 중동과 평양을 오가며 내리 3경기를 치러야 하는 북한은 일정대로라면 중국 항로를 우회해 한국에 입국, 최종전을 치러야 한다.
또 휴일에 몰려들 붉은악마의 열띤 응원전과 홈그라운드에서의 적응력은 남측의 확실한 경기력 우세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이래저래 북한 입장에서 서울 경기는 얻을 것이 없다.
지난 3월 북한이 평양 경기를 무산시킨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평양의 심장부이자 북한의 상징 중 하나인 김일성 경기장에서 만큼은 남한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정치적 논리 못지않게 작용한 것.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홈팀의 권한을 있는 대로 휘둘러 남측을 곤란하게 했다. 그럼에도 1차전 0:0 무승부를 기록한 북한은 이번 2차 남북전에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남북경기는 FIFA의 중재안을 따른 모양새지만 여기도 복잡한 속사정이 있다. FIFA 결정이 내려지기 전 북한이 먼저 중국 개최를 제안해온 것.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막말이 오고갈 만큼 치열했던 남북 축구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우리 측 협상대표로 나선 조 부회장은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통해 “지난 2월 마지막 2차 개성회담에서 북한이 중국 베이징에서 경기를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는 뒷얘기를 털어놨다. 그는 “우리가 FIFA 원칙대로 애국가 연주와 태극기 게양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측이 ‘이명박(대통령)이 그렇게 하라 시켰냐’고 소리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우리가 평양 경기를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회담이 결렬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FIFA가 홈팀인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며 상황은 역전됐다.
북한은 일방적으로 훈련장소를 옮겨 같은 연습장을 쓰기로 한 우리 대표팀을 골탕 먹인 것부터 시작해 경기에 사용하는 공인구도 일방적으로 바꿨다. 경기 이틀 전 통보된 공인구 교체 소식에 대표팀은 연습할 공을 구하지 못해 한국에 ‘SOS’를 보내기까지 했다.
지난 3월 무슨 일 있었나
평양 경기는 FIFA가 북한에게 준 ‘선물’이었다. 북한은 입장권 가격도 가장 좋은 좌석 1000위안(약 13만9천원), 1등석 250위안, 2등석 200위안 등 비싸게 정해 적지 않은 입장수익을 챙겼다.
당시 축구협회는 북한의 횡포에도 ‘참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협회 관계자는 “북한이 홈팀 자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쪽 결정을 대부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6월 22일 대한민국 홈경기를 앞두고 축구협회가 북한의 선동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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