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길 대한체육회장 사퇴내막
김정길 대한체육회장 사퇴내막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8-05-08 15:15
  • 승인 2008.05.08 15:15
  • 호수 732
  • 5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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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와 마찰 …떠난다”

김정길(63) 대한체육회장이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가 임기를 10개월이나 남긴 상태에서 자진 사퇴한 배경과 후폭풍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 회장 본인이 사퇴 과정에서 새 정부와 적잖은 마찰이 있었음을 공공연히 밝혀 파문을 예고한 탓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체육회장과 사무총장이 한꺼번에 공석이 된 초유의 사태가 베이징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벌어졌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김운용, 박용성, 이건희 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줄줄이 낙마하거나 퇴출기로에 놓인 가운데 자칫 한국 스포츠 외교가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어 앞으로의 대응에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 체육계와 정치권이 얽힌 사태의 내막을 집중 취재했다.

김 회장은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회관에서 사퇴를 공식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체육회장으로 올림픽을 지원해야할 정부와 최근 불편한 관계가 계속돼 올림픽 준비와 체육계 현안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임기 중 물러나는 이유가 새 정부와의 마찰 때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유인촌 장관과 자존심 싸움

김 회장이 스스로 언급한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에는 어떤 내막이 있을까. 그가 이명박 정부와 본격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취임한 직후다. 유 장관은 “코드에 맞지 않는 단체장들은 떠나라”며 노골적으로 참여정부 시절 단체장들을 압박해왔다.

김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 초부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관계자들로부터 정권이 바뀌었는데 임기를 채울 수 있느냐는 질문을 직·간접적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이는 새 정부가 자신의 사퇴를 기정사실화 해 압력을 가했다는 우회적 불만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문체부와 김 회장의 갈등은 체육회 새 사무총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한체육회가 구안숙 사무총장 내정자 임명을 놓고 문체부와 가시 돋친 냉전을 벌인 것이다. 구 내정자는 미국 LA출신 한국인으로 국민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금융전문가로 알려졌다.

문체부는 ‘구 내정자가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어 공직자로 부적합하다’며 지난달 14일 임명을 거부했다. 체육회 역사상 이사회 추천을 받은 사무총장 내정자가 상급기관에서 거부된 것은 유래 없는 일이다. 구 내정자는 결국 지난달 24일 스스로 물러났다.

체육계에서는 김 회장이 이를 자신의 사퇴압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문체부는 지난 25일과 27일 김 회장에게 잇따라 만남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새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 장관과 김 회장 사이에 복잡한 자존심 싸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회장은 처음 사의 뜻을 밝힌 지난달 25일 체육회 이사회에서도 문체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체육계 수장이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 일은 내가 마지막이 돼야 한다”고 말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련의 상황만 보면 김 회장을 지난 정부 인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숙청된 ‘피해자’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 회장 역시 새 정부 코드인사의 ‘수혜자’였다.

김 회장은 2005년 2월에 치러진 체육회장 선거에서 총 45표 중 29표를 얻어 이연택 당시 체육회장을 13표 차로 따돌리고 체육회 수장에 등극했다.

하지만 석연찮은 문제가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터졌다.

검찰은 이 전 회장이 헐값에 땅을 사들인 의혹을 제기, 비리 연루 여부를 수사한다며 소환조사 계획을 발표했다. 수사를 마친 뒤 이 전 회장에게는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지만 선거판세는 이미 기울대로 기운 뒤였다.

‘현장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회장’으로 체육계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이 전 회장은 그길로 낙마했다. 미묘한 시기에 터진 검찰 수사가 정권과의 교감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난무했다.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 회장은 취임 뒤 ‘낙하산 임명된 실세 정치인’이란 비난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김 회장만 피해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물갈이 되는 체육단체장의 고충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주관부처인 문체부의 입장은 한결같다. ‘정치적 의도나 외압은 전혀 없다’는 것. 문체부는 이번 김 회장의 사퇴가 정부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밝혔다. 갈등의 핵심이 된 체육회 사무총장 내정자 승인 문제는 회장 사퇴와 별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체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체육인은 없다. 문체부는 지난 28일 긴급간담회를 열고 김 회장 사퇴의 후폭풍을 줄이기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문체부 측은 “대한체육회에 더 이상 정치인이 기웃거리면 안된다. 다음 체육회 수장은 반드시 체육인 출신으로 선출 해 체육인에게 스포츠를 돌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체부의 ‘약속’이 실현될 지는 미지수다. 스포츠 인기가 수직상승하며 정치인에게 있어 쉽게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체육단체장은 탐나는 자리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은 2002 월드컵 4강 열기에 힘입어 대권에 도전하는 등 주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대표적인 경우다. 김혁규 한국배구연맹(KOVO) 회장과 김영수 한국프로농구연맹(KBL) 총재도 정치인 출신이다.

또 예산 대부분을 국고에 의존하는 체육단체는 실세 정치인에 대한 묘한 기대심리를 갖고 있다. 실제 한국여자농구연맹의 경우 정치인 총재가 부임한 뒤 팀 수가 늘고 흑자를 내기도 했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들이 체육단체를 향한 정치인들의 ‘러시’를 부추긴다는 것이 체육계 안팎의 목소리다.


문체부 “정치적 의도 전혀 없다”

한편 새 체육회장을 선출해 대한체육회가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려면 최소 1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새 체육회장 후보로는 김정행(65) 대한유도협회장, 천신일(65) 대한레슬링협회장, 이에리사(54) 태릉선수촌장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김정행 대한유도협회장은 용인대 총장으로 체육인(유도) 출신이다. 그는 지난 2002년 김운용 전 회장이 사퇴한 뒤 회장 직무대행을 경험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히나 외교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이에리사 촌장은 이명박 정부가 여성인재 등용에 힘쓰고 있다는 점에서 차기 회장으로 손색없지만 올림픽을 코앞에 둔 상황이라 회장직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천신일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은 12년 간 레슬링협회장을 수행하며 레슬링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정부로부터 맹호장을 수상한 베테랑 체육인이다. 하지만 그는 레슬링 관계자들에게 출마 의사가 없음을 밝힌바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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