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선수 차출 갈등 ‘정면충돌’ 로 번진다

겨울리그를 무사히 마친 여자배구계가 뒤늦은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대표팀 차출 과정에서 협회와 프로구단 사이의 신경전이 갈등을 넘어 정면충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대한배구협회는 지난달 20일 정대영(27·GS칼텍스)·황연주(22)·김연경(20·이하 흥국생명) 등 3명을 무더기로 상벌위원회에 회부했다. 이들은 모두 팀 우승과 프로배구흥행의 열쇠를 쥔 스타플레이어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배구 무대 선봉장으로 나설 주축 멤버들을 협회가 앞장서 내친 것이다. 문제의 선수들은 모두 부상 치료와 수술을 이유로 대표팀에 합류하지 않거나 중도하차했다.
협회는 이 과정에서 선수들 의지보다 소속구단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애국심과 선수 보호라는 명분으로 맞부딪친 여자배구계의 갈등 전모를 들여다봤다.
가장 먼저 협회와 마찰음을 낸 것은 이번시즌 우승팀 GS칼텍스의 간판 센터 정대영이다. 정대영은 지난달 11일 발목 수술을 받으며 대표팀 차출대상에서 끝내 제외됐다. 협회는 최근 챔피언결정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날개를 단 정대영의 대표팀 합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시즌 최우수선수(MVP)로 이름을 올린 정대영은 태릉이 아닌 병원행을 택했다.
주포들 줄줄이 ‘앓는 소리’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계속 밝혀왔던 정대영은 오른쪽 발목 수술을 결정해 결국 태극마크와 인연을 끊었다. 이에 이정철 대표팀 감독은 모 일간지를 통해 “정대영이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럼에도 선수 스스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고 공언한 탓에 협회는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연경, 황연주 등 대표팀 주포들이 줄줄이 ‘앓는 소리’를 내자 협회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김연경은 평소에도 베이징 올림픽 출전에 대한 욕심을 밝혀왔던 선수. 하지만 그를 진찰한 병원은 ‘오른쪽 무릎 연골이 2cm정도 찢어졌다’는 진단을 내놨다. 김연경 역시 지난달 16일 수술대에 올랐고 주치의는 4개월의 치료기간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놨다.
협회와 프로구단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도 이때부터다. 김연경이 수술을 결정하기 전 소속팀 흥국생명은 부상 사실을 대표팀에 알려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협회는 또 다른 지정병원에서 지난 13일 재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연경과 흥국생명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의사 “당장 수술 필요”
이튿날 이정철 대표팀 감독과 협회 관계자들은 선수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직접 찾아가 그를 만났다. 정확한 부상 정도를 확인하고 수술 전 선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협회와 구단의 줄다리기는 1시간 넘게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경의 부상을 놓고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흥국생명 입장과 ‘조금 늦춰도 괜찮다’는 협회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던 것.
이 감독은 “김연경이 올림픽에서 뛰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차 검진 때도 수술을 조금 미뤄도 괜찮다 들었다. 선수를 예선전에서 혹사시키려는 게 아니다. 중요경기에 적절히 투입해 부상이 심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겠다”며 흥국생명 담당자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술을 담당할 전문의가 나서 양쪽 실랑이를 막았다. 의사가 “당장 수술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흥국생명의 완고한 만류에 이 감독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수생명 끊긴다는데…”
여자배구대표팀 소집을 놓고 줄줄이 터진 악재는 황연주의 태릉선수촌 무단이탈 사태로 절정에 이르렀다. 황연주는 지난달 18일 밤 구단 관계자 손에 이끌려 대표팀에서 선수촌을 나왔다. 지난해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은 황연주는 세 번에 걸친 정밀진단에서 각각 다른 부상부위가 발견돼 대표팀 하차 여부를 이 감독과 상의하던 중이었다.
흥국생명 지정병원인 서울정형외과는 ‘교체출전 정도는 가능하지만 무리할 경우 무릎십자인대를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소견을 내놨다. 대표팀은 대표팀 지정기관에서의 정밀진단과 선수보호를 약속했지만 흥국생명은 서둘러 황연주를 태릉에서 데리고 나왔다.
협회는 ‘대표팀 기강을 무시한’ 황연주를 무단이탈로 규정하고 그를 대신해 나혜원(GS칼텍스)을 대표 선수로 뽑았다.
협회 관계자는 “각 포지션 별로 가장 믿을 만한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이유로 대표팀을 떠났다”며 올림픽 준비에 비상이 걸렸음을 인정했다.
그는 또 “프로팀이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자기 선수만 챙기려든다. 부상이 있더라도 일단 선수촌에 들어온 뒤 지정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는 게 관례다. 구단이 먼저 나서 관례를 무시하고 선수를 빼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애국심만 강조해서 되나
반면 관련 구단들은 ‘선수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흥국생명 홍보팀 관계자는 “황연주의 경우 왼쪽 무릎이 약간 아픈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협회 지정 병원에서 ‘오른쪽 무릎이 몹시 좋지 않다. 이대로 뛰면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선수보호 차원에서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배구대표팀은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예선전(5월17일~25일·일본 도쿄)을 코앞에 두고 비상이다. 예선전에는 일본을 제외하고 태국, 카자흐스탄, 푸에르토리코 등 한 수 아래 국가들이 출전, 무난한 통과를 점쳤었다. 하지만 뜻밖에 불거진 대표팀 차출 갈등으로 주전들이 대거 빠지면서 올림픽 출전 자체가 안개 속에 빠졌다.
구단과 협회의 차출 갈등은 수년 동안 있어온 해묵은 논쟁거리다.
프로선수들은 아마추어인 대표팀에서 혹시 있을 부상 걱정에 몸을 사린다. 구단 입장에서는 대표팀 차출로 팀 훈련을 소화 못한 선수들이 다음시즌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협회가 ‘애국심’과 ‘국위선양’이라는 명분에만 기대 프로팀과 선수들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한 대표출신 선수는 “지난해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빠지며 체력을 아낀 것이 올해 활약할 수 있는 계기”라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까지 했다.
남자대표팀의 경우 ‘병역면제’라는 달콤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여자대표팀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프로배구가 출범해 자신의 몸이 밥줄이 된 선수들이 ‘태극마크’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같은 지루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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