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생 신화’ 꿈꾸는 프로스포츠 88만원 세대

좋아하는 축구를 하며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프로선수는 소년들의 로망이다. 마치 노력만 하면 곧 손에 쥘 수 있는 열매 같다. 현실도 과연 그럴까?
매년 프로팀 문을 두드리는 새내기 선수들은 300여명. 그 중 2/3는 프로팀 ‘간택’을 받지 못해 정든 축구판을 떠난다. 2008 K리그 신인선수 선발 드래프트에는 모두 91명의 선수가 프로팀 유니폼을 입었다. 전체 지원 선수의 31%에 불과하다.
6라운드에 걸친 선수 선발에서 1순위로 입단한 선수의 연봉은 5천만원, 6순위로 막차를 타도 몸값 2천만원은 챙길 수 있다. 올 초 이렇게 선발된 91명 중 ‘정식’ 1년차 선수는 63명이었다. 나머지 28명은 번외지명, 일명 ‘연습생’이다.
연봉 1200만원, 1년 단기계약, 기타수당 없음. 또 하나의 ‘연습생 신화’를 꿈꾸는 번외지명 선수들은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88만원 세대의 일원이다.
프로팀은 순위 밖 번외지명 선수를 뽑는데 거리낌이 없다. 재작년 신인 선수 드래프트 제도가 부활한 뒤 2006년 12명의 선수가 연습생으로 뽑혔다. 2007년에는 31명, 올해는 28명이 프로팀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프로팀이 연습생 선발에 적극적이다.
프로팀 “싼 값에 좋은 선수 찾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싼 값에 여러 선수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순위 지명을 받은 선수가 2천만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다. 한정된 자금으로 선수를 수급하는 구단 입장에서 4백만원만 더 얹으면 연습생 두 명과 계약할 수 있는 장점을 무시하기 힘들다. 돈이 오가는 프로무대에서 검증되지 않은 어린 선수를 수천만원대 돈을 주고 덥석 데려오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시민구단 대전시티즌은 올해 무려 5명의 번외지명 선수를 뽑았다.
대전 관계자는 “번외지명이 프로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며 구단과 선수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프로팀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는 선수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연습생들이 받는 연봉은 1200만원. 그나마 매달 1백만원씩 고스란히 쪼개 받는 것도 아니다.
군부대인 광주 상무와 제주·포항·수원 등 4팀을 제외한 모든 프로팀은 관리비(숙소제공) 명목으로 매달 10만원을 원천징수한다. 국민연금이나 보험에 가입되면 그만큼의 몫을 더 떼 낸 나머지 금액만 통장에 들어온다. 연습생들은 얼추 9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으며 단내 나는 훈련을 견디는 것이다.
‘1년만 참으면 나아지겠지’란 보장은 없다. 이들이 프로팀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간은 단 1년 뿐. 한 시즌을 보낸 뒤 팀과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짐을 싸야한다. 운 좋게 다른 팀을 찾아 이적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그대로 사라진다.
어떻게든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주전 선수들과 스타플레이어에 가려진 연습생들은 2군에서 조차 설 자리가 좁다. 지난해 계약을 마친 31명의 연습생 중 올해 프로팀에 남은 선수는 고작 7명. 그중 1군 경기에 데뷔한 선수는 전북의 조성준과 인천의 강수일 둘 뿐이다.
‘연습생 신화’를 꿈꾸며
축구판에 이른바 ‘연습생 신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포항의 레전드(전설)’로 자리매김한 김기동이다. 지난해까지 426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그는 팀 우승 주역으로 모든 연습생이 꿈꾸는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2006년 ‘프로축구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고 국가대표 무대까지 밟은 성남의 장학영 역시 ‘연습생 신화’를 일군 주인공이다. 2006년 대전시티즌 번외지명 선수로 데뷔, 그해 신인왕 후보에 오른 배기종(수원)도 성공적인 연습생 표본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자신들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될 거라 믿고 있다. 때문에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위해 프로팀에 남고 싶어 한다.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혼혈 선수 강수일(인천) 역시 ‘고진감래’ 뜻을 새기고 있다.
그는 “돈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다. 그 경험을 한국 최고무대인 K리그에서 쌓을 수 있다면 돈 없이도 좋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오게 돼있다. 중요한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라 본다”고 말했다.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달리는 연습생. 그들의 선택이 진정한 ‘헝그리 정신’으로 돋보일지, 가망 없는 희망고문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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