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일만의 귀향 “축구교과서 품고 돌아왔다”
327일만의 귀향 “축구교과서 품고 돌아왔다”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7-12-27 15:54
  • 승인 2007.12.27 15:54
  • 호수 713
  • 5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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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룡구단’ 이끈 장외룡 인천 감독
장외룡 감독이 마중 나온 팬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4시. 인천공항 입국장엔 푸른색 유니폼과 머플러를 손에든 20여 축구팬들이 모였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부터 조퇴증을 끊고 달려왔다는 30대 직장인까지, 런던발 비행기의 착륙시간표를 꼼꼼히 살피는 표정은 기대감과 반가움이 엇갈린다.그러길 한 시간. 조금 벗겨진 이마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중년의 사내가 입국장에 들어섰다. 순식간에 몰려든 팬과 취재진들 공세에 잠시 놀란 듯 기자를 향해 “오랜만이네!” 하며 웃는 얼굴은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 장외룡(48)감독. 만년 꼴찌 인천유나이티드의 2005년 준우승 신화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가 이끈 인천의 성공드라마는 지난해 ‘비상(飛上)’이란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최근 허정무 감독과 함께 대표팀 사령탑 자리를 놓고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던 그는 국내 지도자로서 ‘가장 성공적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장외룡 감독과의 밀착대화를 공개한다.


“자리 비운 사이 기다려줘 고맙소”

스스로 ‘행복한 감독’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그다. 지난 시즌 인천 감독 재계약과 함께 잉글랜드 연수란 값진 선물까지 받아서란다.

인천이 장 감독에게 제안한 3년 계약조건엔 1년간의 잉글랜드 연수기간이 들어있다. 한국 프로축구사상 쉽지 않은 제안이다. 그만큼 인천은 장 감독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327일 만에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자리를 비운 지난 10개월간 팀을 이끌어준 박이천 감독과 코칭 스텝들, 또 기다려준 우리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게 체질’이라며 홀로 영국으로 떠날 때도 담담하던 목소리가 그제서 떨린다. 한국에선 제법 유명하지만 영국에선 낯선 동양인일 뿐. 1년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힘들진 않았을까.

“1월 한국을 떠나면서 선진축구 시스템을 배워오겠다고 했죠. 근데 제일 큰 벽이 있었어. 영국 한복판에 떨어졌는데 영어가 안 되는 거야. 죽어라 단어를 베껴 쓰면서 달달 외워도 막상 입이 떨어져야 말이지….”

그대로 런던에 있는 영어학원으로 달려간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매일 3시간씩 무섭게 영어만 ‘팠다’.

처음 중급반에 등록했다 며칠 만에 하급반으로 쫓겨난 것은 굴욕도 아니었다.

“곧잘 따라 가는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봐.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군요.”

나이 50을 코앞에 둔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 들러 몇 시간씩 어린이코너 앞에서 책을 읽었다. 유아용 책을 소리 내서 따라 읽자 영국인들의 따가운 시선도 당연했다. 그러나 “창피할거 같았으면 영국에 가지도 않았다”는 한마디. 역시 ‘외룡사마’다운 배짱이다.


“기러기 아빠 3년…주부 다 됐지”

3년 전 일본에서 잘나가는 감독에서 신생팀 인천의 수석코치로 변신했을 때도 그는 혼자였다. 아내와 딸 진아(브리즈먼 그리피스대 3년), 아들 동훈(존 폴 컬리지고 3년)씨는 호주에 있다.

두 아이 방학 때를 빼고는 늘 혼자 지내던 그라 영국에서의 생활도 어려움은 없었다. 한국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다 반찬을 만들고 청소, 빨래도 직접 한다. 인천 감독이란 직함에 ‘가정주부’ 꼬리표까지 얻은 셈이다.

“귀국 1주일 남기고 아이들이 영국에 건너왔죠. 함께 아스날-첼시 전 구경하면서 회포도 풀었고. 그래도 늘 보고 싶은걸 말로 하면 뭐하나.”

학구열에 불타는 ‘청년’ 장외룡. 그러나 가족 얘기만 나오면 어쩔 수 없는 ‘아버지’가 된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만나자”

설기현이 있는 풀럼과 찰튼을 거쳐 아스날까지 몸으로 겪었다. 단순히 EPL경기만 관전하는 ‘겉핥기식’ 연수로 시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장 감독은 배울 게 있는 팀에 무조건 찾아가 출근도장을 찍었다.

특히 파듀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찰튼에서 그는 한국축구인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었다. 매일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를 도시락을 싸들고 달려가 훈련에 참여한 그다.

“처음 훈련장에 들어갔을 땐 경계부터 했지. 낯선 동양인이 달갑진 않을테니. 인천의 감독이라고 소개하고 몇 주 동안 몸으로
뛰어들었어요.”

어느 날 파듀 감독은 장 감독에게 직접 ‘구단 관계자가 맞붙는 친선게임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약이 있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선수명단에 내 이름이 박혀있더라고. 갔더니 내 유니폼도 만들어 놓고. ‘축구는 만국공통어’라잖아. 함께 땀 흘린 동지로서 더 가까워졌지.”

그가 한 일간지에 기고한 영국 일기엔 재미난 일화가 실렸다. 파듀감독과 2012년 런던올림픽, 2014년 월드컵에서 모국의 감독으로 만나기로 약속한 것. 파듀감독은 장 감독이 올림픽 팀을 이끌고 오면 훈련장 제공은 물론 연습경기 상대로 기꺼이 나
서겠다고 다짐했다. 홀몸으로 부딪친 ‘축구종가’에서 든든한 인맥을 손에 쥔 것이다.


1위 ‘아스날’ 웽거 감독도 만나

지난달 12일 장외룡은 영국생활의 마지막을 앞두고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올해 프리미어리그 1위를 달리며 젊은 선수들을 안정감 있게 이끈 아르센 웽거감독.

1996년부터 명문 아스날을 이끈 그는 장외룡의 역할모델이다.

웽거감독은 “선수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며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있는 자신의 노하우를 전했다. 그는 또 “선수영입에 있어 개인기와 영리함을 가장 큰 조건으로 본다. 체력과 전술은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며 귀띔했다.

기자회견시간을 쪼갠 30분의 짧은 만남이지만 국내 축구인과는 극히 이례적인 만큼 의미가 크다.

1년 만에 돌아오는 장외룡 감독 목표는 팀을 ‘한국의 아스날’로 만드는 것. 인천 유나이티드는 지역민의 투자로 만들어진 시민구단. 자체 유소년 클럽(I-유나이티드)을 운영하며 5명의 청소년대표를 배출한 만큼 기본은 돼있다. 또 인천시내 중학교가 참가하는 ‘미들 스타리그’를 통해 어린 선수발굴에 국내 최고 노하우를 쌓고 있다.


“한국의 아스날 만들겠다”

“당장 비싼 선수를 데려와 우승하는 것도 좋지만 10년, 20년을 내다 봐야지. 무조건 영국의 선진시스템을 그대로 베낄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 현실에 맞게 하나씩 바꿔야죠. 먼저 인천 지역에 팀이 녹아들고 그 다음은 유소년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생각입니다. 영국에 건너간 것도 그들이 갖고 있는 유소년시스템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였으니까. 우리가 발굴한 어린 선수들이 잘 크면 그만큼 팀도 이득인 거죠.” 무명선수들을 이끌고 K리그 권좌까지 노린 ‘도깨비 팀’ 사령탑답다.

영국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을 교과서로 받아들인 장외룡. 그는 선진축구의 해답이 ‘체계적인 유소년시스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팀 인천에 들고 온 ‘교과서’를 풀어놓을 생각이다. 30년간 빽빽이 적어온 축구일지보다 더 많은 기록을 지난 1년간 남겼다는 그가 제자리 걸음 걷고 있는 한국축구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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