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은 신(神)?’ 한국 탁구 자멸하나
‘회장님은 신(神)?’ 한국 탁구 자멸하나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7-12-21 16:35
  • 승인 2007.12.21 16:35
  • 호수 712
  • 5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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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규·현정화 감독 분노 폭발

한국 탁구가 위기를 넘어 자멸하는가. 지난 7일 현정화(37) 여자대표팀 감독이 탁구협회에 사표를 던졌다. “더 이상 무능한 협회의 꼭두각시로 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6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유남규(39) 남자대표팀 감독도 “현 감독과 함께 나가겠다”며 동반사퇴 뜻을 밝혔다.
현·유 감독이 사표를 내던진데 있어 결정적 원인이 된 인물은 탁구협회 수장인 천영석(78) 회장. 1973년 ‘사라예보 신화’를 이룩한 탁구계 원로로 2004년부터 탁구협회장을 맡은 그는 총감독과 기술위원장까지 자처해 사실상 전권을 휘둘러왔다.
한편 베이징올림픽을 8개월 앞두고 탁구협회 대의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전국 11개 시·도 대의원들은 천 회장이 8억원에 달하는 회장출연금을 내지 않았으며, 대표선수들의 국제대회 입상상금을 전용했다는 등의 의혹을 들춰내 그를 압박하고 있다.


“여자대표선수들은 훈련파트너가 모자라 감독인 내가 혼자서 선수들에게 드라이브(공을 깎아서 세게 치는 기술)를 걸어줘야 했어요. 훈련을 마치고 나면 팔이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본적인 훈련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면서 성적만 바라는 게 지금의 협회입니다.”

지난 7일 사표를 던진 현정화 감독은 직접 기자들을 불러 협회의 비정상적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대표팀을 맡는 동안 훈련스케줄, 선수선발 등 어느 것도 감독으로서 직접 관여할 수 없었다. 늘 ‘이번 대회까지만 감독’이란 식으로 권한을 주지 않아 장기적인 계획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천영석 협회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천 회장이 기술위원장까지 겸해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했다”고 폭로했다.


천 회장 눈에 들면 ‘대표선수’

현 감독은 ‘절대강자’ 천 회장의 결정적인 일화도 쏟아냈다. 지난 9월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선수를 결정할 무렵 벤치에서 훈련을 지켜보던 천 회장이 눈에 띄는 선수를 골라 즉석에서(?) 명단을 만들었다는 것.

그 때 한국은 중국에 완패해 동메달 3개를 따내는데 그쳤다. 단체전은 남녀 모두 5위로 밀려났다.

“천 회장 눈에 띈 선수들만 뽑혀 한 번도 내가 원하는 선수를 데리고 국제대회에 나가보지 못했어요. 지금 협회집행부는 선수를 키우는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1993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재패하며 ‘탁구여왕’으로 군림한 그였지만 대표팀 감독으로서 부술 수 없는 ‘유리천정’을 느꼈다고 했다.

천 회장은 선수 선발 뿐 아니라 코치 인선까지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아시아선수권 대회 때 여자대표팀의 강희찬(38) 코치를 해임했다가 현 감독 모르게 슬쩍 복귀 시킨 것도 감독의 존재를 무색하게 한 대목이다.


“차라리 머슴 데려다 써라”

지난 1일 새 신랑이 된 유남규 감독 사정은 더 딱하다. 구단과의 갈등 끝에 실업팀인 ‘농심삼다수’ 사령탑에서 내려온 그는 대표팀 감독직까지 그만둬 ‘실업자’를 자처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난 6일 대표팀 감독을 그만두겠다는 현 감독의 전화를
받은 그는 “나 역시 똑같은 마음이다. 당연히 같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마음을 굳혔다.

유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르겠다’는 말을 들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의견만 내면 ‘건방지다’며 대회 때마다 ‘감독 바꿔버리겠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차라리 머슴을 데려다 쓰라고 하고 싶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천 회장은 지난 10월 말 국가대표 상비군 1차 선발전 때 유남규·현정화 남녀 대표팀의 감독을 해임하겠다고 한 말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자 곧바로 철회했다. 두 감독에 대한 불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특히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유남규는 탁구보다 연예계가 더 어울린다”는 막말까지 쏟아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 실업팀 관계자는 “회장이면 선수격려와 예산확보 등의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냐. 세계 어디를 가도 협회장이 총감독에 기술위원장, 총무까지 겸하는 이상한 조직은 없다”며 쓴 소리를 던졌다. 천 회장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아집을 부린다는 것.

이런 천 회장의 협회운영 능력을 놓고 현 감독은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세계랭킹관리를 위해 선수들이 오픈대회에 참가해야 하지만 돈이 없어 못나갔다. 전지훈련도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니 협회는 투자 대비 경기력 향상을 정말 모르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털어놨다.

천 회장이 2004년 취임하며 약속한 회장출연금 규모는 매년 8억원.

그는 올해 본인 부담금 1억원을 냈다. 그러나 나머지 금액은 마사회 등 후원기관의 사정을 이유로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대의원들, “천 회장 의혹 해명하라”

한편 전국 11개 시·도협회 대의원들은 대한체육회에 임시총회 개최 요청서를 냈다. 탁구협회가 임시총회 개최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체육회 손을 빌린 것이다. 특히 대의원들이 내건 소집안건은 천 회장을 더욱 궁지에 몰고 있다. 여기엔 ‘회장출연금’ 납부가 늦어지는 이유와 대표선수들의 국제대회 입상상금 전용 의혹, 취임공약이었던 ‘횡성 전용훈련센터 건립’이 무산된 경위 등 천 회장의 치부가 포함돼 있다.

체육회는 지난 13일 대의원들의 소집 요청을 받아들여 이달 말 탁구협회 임시 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정현숙 탁구협회 홍보이사는 앞서 매년 8억원의 회장출연금이 늦어진 것에 대해 “(천 회장이)지난해 개인부담금 2억원을 포함, 매년 총회 전까지 빠짐없이 내왔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개인부담금 1억원은 이미 냈고, 나머지 기금은 후원업체에서 받아야 한다. 한국마사회에서 내기로 한 5억원이 아직 걷히지 않아 늦어졌을 뿐”이라고 간접적으로 해명했다.


천 회장, “55년 경험 살렸을 뿐”

한편 천 회장은 지난 11일 모 일간지를 통해 “55년 탁구인으로 살아왔다. 경험을 앞세워 협회를 돌본 것뿐인데 두 감독이 갑자기 그만둬 당황스럽다. 두 감독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 아닌가. 대표팀을 위해 차선책을 빨리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부에서 돌고 있는 자진사퇴설에 대해선 “내년 말까지 회장임기가 남아있다.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20일부터 일본전지훈련을 앞둔 대표팀 일정상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최대한 빨리 새 감독과 코치진을 뽑아야 한다.

현 감독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탁구를 위해선 협회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화는 계속 하겠지만 감독복귀는 없다”고 못 박았다.

“중국 대표팀은 (금메달을 위한) 결전을 준비하는데 어떤 흔들림도 없다” (중국 탁구 대표팀 류궈량 감독)

베이징올림픽을 8개월 앞두고 가장 강력한 경쟁국인 중국은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중국의 주요 언론들은 한국 대표팀의 남녀사령탑인 유-현감독의 동반사퇴를 비중 있게 다뤘다. 천 회장과 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사퇴이유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다.

중국 대표팀 류궈량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감독진에 변동이 있을 것이란 소문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짜여진 계획에 따라 올림픽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이다”고 느긋한 속내를 드러냈다.

구식 행정으로 무너진 한국탁구를 비웃는 일갈이 아닐 수 없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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