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K리그 정상을 차지한 포항 스틸러스의 거미손, 정성룡(22·포항)이 빛나고 있다. 올림픽 대표 소집 중 성남과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긴급 복귀한 그. 팀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정성룡의 출장을 놓고 이견이 엇갈렸지만 파리야스 감독은 그에게 골문을 맡겼다. 결과는 대성공. 1차전 패배로 독이 오른 성남을 상대로 한 골차 신승을 거둔 포항은 2007년 K리그 권좌에 올랐다. 여기에 정성룡의 선방이 무실점 승리의 원동력임은 물론이다. 프로데뷔 5년 만에 첫 우승을 맛보았지만 그의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이운재가 빠진 국가대표팀의 현실적 키워드로 손꼽히는 오늘, K리그를 재패하고 베이징 올림픽을 향해 뛰는 정성룡을 만났다.
지난 13일. 우즈베키스탄과의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을 앞둔 원정길에 그를 만났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용 게임기에 집중한 모습은 스물두 살 여느 청년들과 다를 바 없다. 우승 축하 인사를 건네자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정성룡. 인터뷰 내내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는 침착하기로 소문난 K리그 주전 골키퍼의 명성 그대로였다.
프로데뷔 5년 만에 첫 우승
“우승 소감이요? 마냥 기쁘죠. 팀(포항 스틸러스)은 15년 만에 차지한 우승 타이틀이고 개인적으로는 프로데뷔 5년 만에 첫 우승이에요. 사실 우승 한 번 못해보고 은퇴하는 선배들도 많거든요. 전 굉장히 운이 좋은 녀석이죠.”
지금 그의 소속팀인 포항은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지난 11일 막을 내린 K리그 정규리그를 재패한 그들은 25일과 다음달 2일 전남과 FA컵 결승을 벌인다. 국내 최초로 정규리그와 FA컵을 동시 석권하는 ‘도전’인 것이다. 플레이오프부터 챔피언 결정전까지 내리 6경기를 쉬지 않고 몰아쳐 피곤할 법도 한데 자신감만큼은 최고조다.
“일요일에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받은 휴가가 딱 사흘이에요. 저도 올림픽 팀 소집이 끝나면 곧장 FA컵을 준비해야죠. 지금 몸은 힘들지 몰라도 선수단 전체가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에요. 선수들이 링거를 맞아가며 체력을 보충할 만큼 열기도 뜨겁고. 무엇보다 상승세를 무섭게 탔기 때문에 정신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끝을 봐라” 아버지의 유언
외아들인 정성룡은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입학 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외아들인 그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정성룡은 남보다 철이 일찍 든 편이다.
주위에선 그가 커갈수록 아버지를 많이 닮아간다고 한단다. 유난히 자상하셨던 아버지가 어린 정성룡에게 입버릇처럼 전하던 말은 “무슨 일이든 끝을 보라”는 한마디.
“좋은 분이셨어요. 지병으로 좀 일찍 세상을 떠나셨지만 저한텐 좋은 기억만 남겨주셨어요. 생전에 늘 그러셨죠. ‘무슨 일이든 시작했으면 끝을 보라’고.
사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수비수를 봤어요. 그러다 원래 있던 골키퍼 친구가 갑자기 그만 두는 바람에 대타로 골키퍼 장갑을 끼게 됐죠. 시작은 우연이었는데 막상 시합에 나갔더니 저한테 맞더군요. 아버지 말씀을 그때부터 쭉 새기게 됐어요. 골키퍼로 축구판에 이름을 알리게 됐으니 제대로 ‘끝’을 보겠다고.”
심장에 새긴 5계명
지금도 힘이 들거나 고비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그. 시련에 부딪쳐 아파하는 것보다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정성룡은 고비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왔다.
철이 들고 난 뒤 정성룡은 구체적인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프로구단 입단, 국가대표 발탁, 해외진출’이 그것. 18살이 되던 해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고, 지난 7월 이운재, 김용대 등 선배들과 나란히 아시안컵 대표로 선발되며 이미 앞의 두 가지 목표는 이루었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정성룡을 키운 마음속 다짐도 자랐다. ◆연습에는 장사 없다 ◆죽을 만큼 노력하자 ◆안심하면 무너진다 ◆불안하면 연습하자 ◆나를 넘어서야 한다- 정성룡이 심장에 새긴 5계명이다.
정성룡에게 영감을 준것은 월드스타 비. 2년 전 TV에서 우연히 가수 비의 다큐프로를 본 그는 연습생 시절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비의 처음이 2군 선수인 자신과 닮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비의 성공 스토리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가슴속 5계명은 그에게서 따왔다.
“지금도 배우는 중이지만 한참 프로에 적응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당시 김병지(현FC서울) 선배님에 가려 1군 후보와 2군을 오갈 때였는데 겉으로 내색 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다짐을 많이 했죠. 2인자인 지금을 넘어서 앞으로 가야 한다고.”
대선배 김병지가 서울로 이적하고 결국 2006년부터 정성룡은 팀의 주전 골키퍼로 경기를 소화했다. K리그 현역 가운데 최연소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찬 것이다.
골키퍼계 ‘교과서’ 되고 싶다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과 FA컵 결승, 내년 A3대회와 AFC 챔피언스리그까지 모두 소화해야 하는 정성룡의 스케줄은 누구보다 빡빡하다. 하지만 어느 한 경기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는 욕심 많은 청년이다.
“프로구단에 입단해 국가대표 유니폼까지 입었으니 이미 두 가지 목표는 이뤘어요. 마지막 남은 꿈은 해외 리그에 진출한 국내 1호 골키퍼가 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만큼은 ‘골키퍼계의 교과서’적인 선수가
되고 싶어요.
가장 가깝게는 함께 팀 생활을 했던 김병지 선배를 많이 닮고 싶습니다. 처음 프로에 진출했을 때 가장 많은걸 가르쳐주신 선배님이시고, 현역 선수로 서른일곱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몸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에요. 그분의 뒤를 이어 후배들에게 교과서적인 선배로 기억되는 것이 제 또 다른 꿈입니다.”
이수영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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