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는 20년은 후퇴했습니다.” 한 원로 축구인의 푸념이 여운을 남긴다. 최악이다. 난파 위기에 직면한 한국축구다. 올림픽대표팀 사령탑 선임을 둘러싸고 최근 있은 일련의 사태들은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이 과정에서 홍명보 코치가 희생양이 됐다. 차기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유력했던 홍 코치는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났다. 대표팀의 07 아시안컵 부진에 일련의 책임이 있는 기술위원회(위원장 이영무)도 권한만 행사했을 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기술위는 홍명보 코치를 대신해 K리그 부산아이파크 사령탑에 오른지 불과 보름밖에 안된 박성화 감독을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에 선임했다. 좋은 소리가 있을리 없다. 이래저래 말썽많은 한국축구. 큰 대회만 끝나면 늘 벌어져온 일이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인다.
◆ 올림픽 감독 선임 뒷말 무성
내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할 22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 차기 사령탑으로 박성화 감독이 부임했다. 오는 8월22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있을 우즈벡과의 최종예선 첫 경기가 공식 데뷔전이 될 전망이다.
솔직히 축구협회의 이번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6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을 리드할 박 감독의 이력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국내에서 누구보다 청소년 선수들을 잘 알고 있고, 관련 정보에도 해박하다. 프로팀 유공과 포항에서 감독을 맡았던 그는 01년부터 05년까지 약 4년여에 걸쳐 청소년팀을 맡아 차세대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주력, 비교적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문제는 박성화 감독이 올림픽팀 지휘봉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사퇴한 핌 베어벡 전 대표팀 감독의 후임으로 유력했던 홍명보 코치가 왜 탈락했냐는 점이다.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홍 코치는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그대로 잔류하게 됐지만 8월6일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그의 모습은 왠지 부자연스러웠다. 박성화 감독을 선임하는 바람에 축구계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한 축구협회가 이날 인터뷰를 서둘러 준비한 인상이 다분했다.
홍 코치는 말을 아꼈다. 다만 축구협회가 홍 코치의 임용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라고 밝힌 ‘경험 부족론’에 대해선 “20년의 현역 시절, 누구보다 많은 대회를 경험했다. 지도자 경험은 부족해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 본다”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셈이다. 일각에선 ‘보이지 않는 힘(?)’에 홍 코치가 밀려났다는 반응을 보인다. 38세에 불과한 홍 코치가 올림픽팀 지휘봉을 잡을 경우, 자칫 선배 축구인들이 설 자리를 잃을 수도 있어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아직까진 가정법에 불과하지만 그간의 모습으로 미뤄볼 때 충분히 가능한 얘기들이다.
◆ 기술위원회의 두 얼굴
박성화 감독에게 올림픽대표팀 지휘봉을 맡긴 기술위원회(위원장 이영무)의 행태와 행동에도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다.
핌 베어벡 전 대표팀 감독이 07 아시안컵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기술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불안한 모습을 여러 차례 연출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이뤄진 올림픽 감독 사령탑 선임 과정도 한 예다.
기술위는 애초에 홍명보 코치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경험이 아직 부족해 외풍이나 외압에 흔들릴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됐단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홍 코치도 당시엔 분명 유력한 대표팀 사령탑 후보였다. 협회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홍 코치가 감독을 맡을 수 있다’는 소문들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오히려 K리그 부산아이파크의 지휘봉을 막 잡은 박성화 감독이 논외 대상이었다.
정작 홍 코치가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승격되기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07 아시안컵 대미를 장식한 일본과의 3·4위전에서 홍 코치가 베어벡 감독과 함께 동반 퇴장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AFC(아시아축구연맹)가 대 일본전 퇴장사건을 이유로 홍 코치를 징계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대한축구협회에 보내자 그제서야 기술위는 홍 코치를 3명으로 압축된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경험 부족’은 ‘AFC 징계건’을 미처 상기하지 못한 기술위의 실수를 덮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술위는 여기서 임무를 종료했어야 했다. 축구계 안팎에서 일던 거센 논란 속에서 박성화 감독과 홍명보 수석코치, 강철 코치 체제의 올림픽대표팀 코칭스태프 진용을 꾸린 기술위의 위원들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결국 07 아시안컵에서의 부진은 물러난 핌 베어벡 전감독의 책임으로 모조리 돌아갔다.
불행하게도 기술위는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다. 특정 대회만 끝나면 감독만 선임하고, 부진할 시 퇴진시킬 뿐 적극적인 자세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외국인 감독들은 고민을 함께 나눌 이들이 없어 외로웠다고 하소연했다. 상대팀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다녀오는 기술위원들의 출장 보고서도 대다수 국내 언론들의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성의없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의미다.
권한만 있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기술위원회. 감독교체보다 시급한 일은 따로 있다.
◆ 한국축구 리그 어디로?
프로축구연맹의 쌓인 오랜 불만이 드디어 터져나왔다. 협회가 올림픽 최종예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성화 감독을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하자 연맹은 곧바로 서운함을 표출해 보였다.
당연했다. 지난 아시안컵까지 협회 기술위원으로도 활동했던 박 감독은 올림픽팀 지휘봉을 잡기 불과 2주전, 올시즌 K리그 전반기를 마치고 물러난 앤디 에글리 감독의 후임으로 부산아이파크의 사령탑에 선임됐었다.
하지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협회나 기술위는 프로축구와 리그에 대해선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막가파’식으로 박 감독을 올림픽호 선장으로 앉히는 믿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무엇보다 프로리그가 최우선 고려조건이 되는 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프로연맹 고위 관계자는 “기술위원회는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고 일갈한 뒤 “안하무인격 행정을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축구에는 오로지 대표팀만 있을 뿐이다. 리그는 들러리일 뿐, 남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올림픽에도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이 한심하다”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달새 감독을 3번이나 교체하는 해프닝을 벌인 부산 프런트들과 팬들도 화가 잔뜩 났다. 한 구단 직원은 “(협회를)용서하기 어렵다. 선수들의 병역혜택이 걸려있어 올림픽을 무시할 수 없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전에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 구단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은 모습이 괘씸하다”고 서운해했다.
박 감독이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 팬들은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항의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각종 스포츠 게시판에 협회 행정을 성토하는 글을 올려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한 팬의 글귀가 섬뜩하다.
‘이해하고 싶지만 믿을 수 없기에, 너무 실망했기에 더 이상 축구를 보지 않겠다. 선수들과 팬들을 배신한 박성화 감독이 얼마나 잘될 수 있을까?’
늘 ‘축구의 근간은 팬’이라고 말해온 축구협회다. 비난과 논란속에 추대된 박성화 감독이나 협회는 내년 8월 베이징올림픽까지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할 듯 싶다.
남장현 yp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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