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배지 or 소신’ 야속한 카멜레온들

당선과 권력을 좇아 소속 정당을 갈아 치우는 ‘철새 정치인’의 백태는 6·2 지방선거 역시 여전했다. 지난 28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국 지방선거 출마자 가운데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당으로 ‘말을 갈아탄’ 출마자들이 10여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여당으로 입성한 경우가 6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소신이 안 맞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권자들이 대다수다. 풀뿌리 선거전에 ‘작은 철새’들이 득실거렸다면 중앙정치무대에서는 ‘황제 철새’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선거철마다 상대진영으로부터 ‘변절자’ 운운하는 비난에 시달리는 유명 정치인이 적지 않다. 그들의 얼굴 바꾸기가 말 그대로 ‘소신’ 때문인지, 아니면 ‘금배지’의 영광을 위해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변절자’ 낙인, 이재오vs손학규
특히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과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는 대표적인 ‘철새’로 낙인찍힌 경우다. 이 위원장은 과거 노동운동과 인권운동계의 대표 아이콘으로 활약했으며 민중당 창당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1994년 돌연 신한국당에 입당,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노동계에 대한 변절’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이 위원장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서울 은평(을)에서 3선 국회의원으로 거물이 됐지만 2008년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 져 낙선, 한동안 ‘야인’이 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여당 내에서도 변절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17대 국회 당시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수석최고위원으로 활약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후 대통령 후보경선이 시작되자 돌연 ‘박근혜 저격수’를 자처하며 ‘친이’의 대표주자로 변신했다.
그에 필적하는 상대가 바로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다. 유신정권 치하에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학생운동을 주도한 노동운동가 출신의 손 전 대표는 1993년 돌연 민정당에 입당했다. 민정당은 손 전 대표가 재야운동가 시절 줄곧 비판하던 대표적 정치집단이었다.
그는 민정당이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간판이 바뀌는 동안 내리 3선에 성공했고 문민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2002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손 전 대표는 뛰어난 행정력으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됐다.
그러나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을 뛰쳐나온 그는 돌연 민주당 입당을 선언해 주위를 아연실색케 했다. 이후 상황은 잘 알려진 대로 정동영 후보와의 경선에서 패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잃는 좌절을 겪었다.
송광호 한나라당 의원의 당적도 화려하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당선된 송 의원은 이후 민자당에 입당,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다(多)탈당’ 경쟁 송광호vs이인제
이후 자민련으로 말을 갈아탄 그는 16대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3년 다시 탈당을 선언한 송 의원은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아 낙선했지만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 현재 ‘친박계’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다(多)탈당 최고기록’ 보유자인 이인제 무소속 의원은 이 부문에 있어 ‘역사’로 통할 정도다.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뒤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한 이 의원은 독자 출마를 선언했으나 패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이끈 이 의원은 2000년 총선 승리를 견인했으나 2002년 대선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진 뒤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해 지지율이 급등하자 다시 탈당을 결행, 자민련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당시 부총재 겸 총리권한대행으로 역할을 소화했지만 자민련 후신인 국민중심당에서 다시 뛰쳐나와 민주당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18대 총선 때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또 탈당한 이 의원은 무소속으로 출마,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은 직접 창당 작업에 나섰다 1주일 만에 맘을 바꿔 빈축을 산 경우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재야정치인 장기표, 박계동 등과 가칭 ‘무지개연합’을 창당하려 했으나 정확히 1주일 뒤 한나라당 입당을 선언, 전국구 2번을 배정받아 전국구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2002년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 ‘30대 기수론’으로 바람몰이를 한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도 ‘철새’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김 최고위원은 이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다 정몽준 후보 진영으로 전향해 비난에 시달렸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후보 단일화 성사를 이끌며 기사회생했으나 대선 하루 전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약속을 깨는 바람에 이미지를 구겼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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